동철장(銅鐵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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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철을 만들거나 동철을 이용하여 무기나 생활 물품 등을 만드는 장인.

개설

우리나라에서는 동철을 생산하는 양이 많지 않았으며 수요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수입을 하였으므로 동철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장인은 없었다. 동철은 주로 주장(鑄匠) 또는 주성장(鑄成匠), 동장(銅匠)이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담당 직무

동철을 취련하거나 동철을 재료로 하는 각종 총통, 종, 동전, 금속활자, 각종 그릇 등을 만들었다. 주장이 동철을 제련하였음은 1679년(숙종 5) 기록에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신하가 주물의 기술이 주장마다 다르지만 10여 일 정도를 하면 동철을 제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또한 1644년(인조 22)에 서울에서 살고 있는 호조의 관로장(灌爐匠) 김신장(金信張)과 자근복(者斤福)이 동철을 취련하는 일을 하게 된 대가로 옷을 지급받고 파발마를 얻어서 작업장에 온 기록에 있어 특정한 동철장(銅鐵匠)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금속을 다룰 수 있는 장인이면 누구나 동철을 취련하거나 동철제 용품 등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변천

고려시대에는 경기도 지역의 소(所)에서 동철을 바치는 장인이 있었다. 이들은 동철의 공물량이 너무 많아 도망갔으므로 정부에서는 공물의 양을 줄였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생산을 하지 못하여 조선초기부터 정부에서는 일본에서 동철을 적극 수입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도 몇 지역에서 동철이 생산되었다. 이런 지역에서는 동철을 취련하는 장인이 있었을 것이다. 1434년(세종 16)에 군기감(軍器監)에 동장 2명, 주장 8명 있었으나, 1460년(세조 6)에는 동장이 없어지고 주성장 15명이 있었다. 그 후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된 1485년에는 다시 동장이라는 장역(匠役)이 생겨 공조(工曹)에 4명, 상의원(尙衣院)에 4명이 있었으며, 주장은 공조에 20명, 상의원에 4명, 군기시(軍器寺)에 20명, 내수사(內需司)에 10명 등 총 62명이 있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志勝覽)』
  • 강만길, 「조선전기의 관장제와 사장」, 『조선시대상공업사연구』, 한길사, 1984.
  • 이혜옥, 「조선전기 수공업체제의 정비」, 『역사와 현실』 33,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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