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해(醓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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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제의에 사용하기 위해 고기를 소금에 절인 음식.

개설

조선시대 왕실의 각종 제의(祭儀)에 제물(祭物)로 마련했던 음식으로 보통 육류의 살코기를 소금에 절여서 만들었다. 반드시 두(豆) 제기에 담아서 진설했다. 조선초기에 왕실의 제사를 맡았던 전사시(典祀寺)에서 만들었고, 그 이후 직제 개편으로 봉상시(奉常寺)에서 맡았다.

만드는 법

담해를 만드는 법에 대해 종종 논란이 있었다. 숙종 때 예조(禮曹)에서 올린 종묘의 제물 중 담해[醓醢]에 대한 언급을 보면, 도식(圖式)에는 건어(乾魚)의 포(脯)를 잘게 썰어 양국(梁麴)과 소금을 섞어 담그고, 좋은 술을 발라 항아리에 백일 동안 넣어 둔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여서 쌀밥을 그 위에 발라서 만든다고 하였다(『숙종실록』 43년 6월 21일). 그러면서 양국을 사용하여 절이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다만 양국이 좁쌀로 만든 누룩인지, 아니면 일반 술 누룩인지에 대해서는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담해의 재료로 돼지고기나 닭고기를 사용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보았다. 본래 담해의 주재료는 소고기였다.

연원 및 용도

『모전(毛傳)』에서는 육(肉)이 곧 담해라고 했다. 당나라의 공영달(孔穎達)은 소(疏)에서 대체로 고기를 사용하여 해를 만드는데, 특히 즙이 많은 것을 ‘담’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왕실의 오향대제(五享大祭)와 춘추절제(春秋節祭)에서 제물로 사용하였다. 『의례통해(儀禮通解)』의 속주(續注)에서는 담을 육즙(肉汁)이라고 했다. 주자(朱子)는 『시전(詩傳)』 주석에서 담은 해(醢)와 달리 즙(汁)이 많은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담해는 국물이 있는 것, 녹해(鹿醢)는 국물이 없는 것을 가리켰다.

조선 문종 때에는 조선 출신으로 명나라의 환관이 된 윤봉(尹鳳)과 정선(鄭善)이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북경으로 돌아가면서 여러 가지 무리한 요구를 했는데, 그중 하나로 황제의 뜻이라고 하여 담해를 구해 달라고 하여 가지고 갔다(『문종실록』 즉위년 11월 2일).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정약용(丁若鏞)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이담속찬(耳談續纂)」에서 우리나라 속담으로 “담해지시[醓醢之市] 차이불자(嗟爾佛子)”를 소개하였다. 육식을 하면 안 되는 중이 고기를 소금에 절인 담해를 판매하는 가게에 나타난 잘못된 이치를 비유한 당시 속담이다. 그런데 민간에서는 담해를 생선을 소금에 절인 젓갈로 이해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모전(毛傳)』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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