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병(茶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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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술 등을 마실 때 사용하는 병.

개설

조선시대의 다병(茶甁)은 일반적으로는 차를 마시기 위해 쓰인 다기(茶器)의 일부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다병·다종(茶鐘) 등 각종 다구(茶具)들이 진상용으로 제작되었고, 국가의 중요한 의례행사[茶禮]를 지낼 때 의기(儀器)로도 폭넓게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즉 다병은 각종 친목 도모를 위한 모임과 여가 문화에 대중적인 그릇으로 쓰였으며, 중국 사신을 접견할 때와 의례·진상 등의 목적으로도 생산되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다병에 관한 내용이 종종 등장한다. 다병은 하사품이나 의기 등의 용도로 다양하게 쓰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대표적으로는 태종대에 명나라 사신 해수(海壽)가 첨총제(僉摠制)원민생(元閔生)과 통사(通事)김시우(金時遇)를 보내어 암화분색다종(暗花粉色茶鍾), 다병, 유문압청사(有紋鴨靑紗) 등을 중궁(中宮)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태종실록』 17년 7월 21일). 또한 조선을 방문한 중국 사신을 위해 연회를 베푸는 연조정사의(宴朝廷使儀)에서 사준제거(司尊提擧) 1인이 다병을 받들고, 1인은 다종의 쟁반을 받들고 의식을 행한다는 내용이 전해진다[『세종실록』 오례 빈례 의식 연조정사의]. 순조대에도 인정전에서 칙사를 접견하고 다례(茶禮)를 행하는 자리에 “사옹원(司饔院) 가제조(假提調)가 다병을 받들고 나머지가 다종과 반구(盤具) 등을 받들었다.”는 기록이 있다(『순조실록』 즉위년 11월 24일). 이처럼 다병은 단순히 문화생활의 용도뿐만 아니라 의기용이나 다례용으로도 제작되어 왕실 행사나 사신 접견 등에 다양하게 쓰였다. 특히 다병에 관한 기록이 태종 연간부터 순조대까지 이어진 것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왕실에서 애용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는 18세기 초반 영조 연간에 다병이 진상품으로 한 해에 600~700개가량 제작되고, 정조 이후에는 수요층이 더욱 확대되면서 중화풍의 영향을 받은 다병도 다량 생산되었던 점에서 알 수 있다.

형태

일반적으로 다병은 동체(胴體)에 주구와 손잡이가 있어 손으로 잡고 차나 술, 물 등을 따를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관상용 주자(注子)에 비해 크기가 다소 작은 편이다. 조선시대에는 백자, 분청사기, 도기 등으로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조선전기에는 옥호춘병(玉壺春甁)이라고 불리는, 목이 짧으면서 구연부가 살짝 외반(外反)된 형태를 갖춘 다병이 분원에서 제작되었다. 당시는 다병이 백자나 분청사기로 제작되었지만, 조선후기로 갈수록 목이 점차 길어지면서 구연부는 직립이거나 안으로 살짝 말려 들어간 형체를 하고 동체 전반이 풍만한 것들과 각진 것 등 다양한 모양이 대중적으로 제작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는 목이 더욱 길어지고 둔중한 다병이 제작되어 이전에 비해 품질이 뒤처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 방병선, 『조선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2000.
  • 방병선, 『순백으로 빚어낸 조선의 마음, 백자』, 돌베개, 2002.
  • 방병선,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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