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국(鑛山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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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갑오개혁 때 설치되어 광산 업무를 맡았던 관서.

개설

광산국은 갑오개혁 당시 공무아문(工務衙門) 소속 국(局)으로 설치되었다가 이듬해 농상공부(農商工部)가 신설되며 농상공부 소속이 되었다. 1905년(고종 42) 2월에는 광산국이 농상공부 농광국(農鑛局)의 광산과로 축소되었다. 1906년 8월 다시 국 단위로 설치될 때 광무국으로 변경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새로운 관제를 마련하면서 공무아문에 광산국을 설치하였다. 앞서 광산 업무를 맡았던 내무부 소속의 광무국을 계승한 것이었다. 광산국은 각종 광물의 측량·시험·수집·보존 등의 사무를 담당하였다. 관원으로 참의(參議) 1명, 주사(主事) 2명이 있었으며, 철도국장이 광산국장을 겸임하였다. 한편 농상아문(農商衙門) 소속의 지질국도 광물 분석을 담당하는 등 이 시기 광업 관련 관제가 충분히 정비된 것은 아니었다. 광산국은 광산을 관리하며, 광세(鑛稅)도 징수하였으며 거둔 세금은 탁지아문(度支衙門)으로 보냈다. 이듬해 3월 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이 통합된 농상공부에 광산국을 설치하면서, 광산국이 전국의 광산을 일괄적으로 관리하였다.

조직 및 역할

농상공부 광산국에는 광업과와 지질과를 두었다. 광업과는 광산의 조사, 광산 개발 허가 여부, 광구(鑛區)·광업 보호, 광업 기술 등에 관한 사항을 담당하였다. 지질과는 지질·지층의 구조와 광상(鑛床)의 검정(檢定), 토성(土性) 조사, 토산 식물과 토성 관련 시험, 지형 측량, 지질도·토성도·실측 지형도 편제와 그 설명서의 편찬, 유용한 물질의 분석 시험 등에 관한 사항을 맡아보도록 규정되었다.

광산국에는 참의인 국장 1명과 주사 2명이 배치되었다.

변천

1895년 5월 농상공부 대신의 요청에 따라 광산 개발의 절차를 담은 ‘사금개채조례(砂金開採條例)’가 칙령으로 반포되었다. 이에 따라 광산 개발의 인허가 절차와 납세 관련 규정이 마련되어 체계적인 광산 개발 관리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광산을 인허가할 경우 반드시 광산국장이나 기사가 현장을 답사한 후에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운산금광이 왕실 업무를 담당하던 궁내부로 이속되는 것을 필두로 차츰 궁내부가 확대되고 왕실 재정은 확충되었다. 그러면서 농상공부 광무국이 관장하던 광산과 새로 채굴된 광산에 대한 관리권을 왕실 재정을 담당하던 내장원이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강원도 지역을 제외한 전국 대부분의 주요 광산이 내장원으로 이관되었다. 이러한 흐름의 핵심 인물은 이용익(李容翊)이었다. 그는 고종의 최측근이었다는 점에서 전국 주요 광산은 왕인 고종이 장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개항 이후 통리기무아문 → 내무부 → 광무국 → 공무아문 → 광산국으로 이어 오던 광산 관리의 주체는 광무개혁의 추진과 함께 내장원이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농상공부 광산국의 비중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1905년 4월 관제 개편 과정에서 농상공부에 농광국이 신설되었다. 광산국은 그 가운데 한 과(課)인 광무과로 되어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다. 재정 절감책으로 이루어졌지만 실상은 황제권 약화를 기도한 것이었다. 통감부가 설치된 후에는 광산을 담당하는 부서를 독립시키고, 관련 조직과 인원도 증가시켰다.

1906년 1월에는 농상공부에 광업 확장을 명분으로 일본인 기술자를 초빙하여 광업을 정리하려고 시도했다. 1906년 8월 이후 일본은 한국 광산의 장악과 개발을 위해 이름을 달리하여 광무국을 다시 설치하고 그 아래 광업과·지질과를 다시 설치하는 등 몇 차례 관제를 개편했다. 당시 광무국의 설치와 확대는 한국 광산 개발에 많은 이권을 가진 서양인에 대한 통제와 황실이 관장하는 광산에 대한 통제·해체를 목적으로 한 일련의 광업 관련법 제정을 계기로 이루어진 조치였다. 이후 한국 광업에서 일본인의 비중은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만큼 광무국의 업무는 증가하였다.

참고문헌

  • 양상현, 「대한제국기 내장원 재정 관리 연구: 인삼·광산·포사(庖肆)·해세(海稅)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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