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천감(欽天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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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명나라와 청나라 때 천문 및 역법 등을 담당한 관청.

개설

중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의 전통 사회에서 천문 관측과 함께 시간을 측정하고 시보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제왕의 독점적 권한이었다. 그런 이유로 천문과 역법(曆法)을 담당하는 기구가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흠천감(欽天監)은 중국 명·청대 황실의 천문 기구로 천문과 역법 등을 관장하였다. 흠천감의 전신은 사천감(司天監)이며, 전한 때 사천감이라 명명한 이후로 여러 황조를 거치며 태사국(太史局), 사천대(司天臺)로 명명되었으나 명나라 때 흠천감으로 최종 개명되었다.

내용 및 특징

황실의 천문 기구인 흠천감의 전신은 사천감으로, 사천감은 고대 중국의 황실 천문대이다. 전한 때 사천감이라 명명한 이후로 사천감의 수장을 태사령(太史令)이라 하였다. 그 후 여러 황조를 거치며 태사국, 사천대로 명명되었으나 명나라 때 흠천감으로 최종 개명되었다. 고려나 조선전기에는 서운관의 관제에 흠천감의 관제를 참고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년 3월 13일).

동아시아의 천문학을 ‘궁정 천문학’이라 규정짓기도 한다. 천문은 지배자의 통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정체를 알기 어려운 혜성의 출몰은 더욱 주목하였는데, 혜성의 출몰이 의도하는 하늘의 의지를 읽어내려 하였다. 황도(皇道)라는 일정한 궤도를 도는 일월오성과 달리 자미원과 태미원 등 황제가 거주하는 하늘의 별자리를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객성(客星) 즉 혜성과 유성의 존재는 제후의 반란 등으로 해석되어 제왕이 긴장할 수밖에 없는 천변(天變) 현상이었다. 따라서 제왕의 정통성과 통치권의 담보를 위해 천문 역법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흠천감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는 명말청초이다. 서양 선교사인 요한 아담 샬 폰벨(Johann Adam Schall vonBell)이 1645년에는 흠천감의 천문대장을 맡아 이듬해에 시헌력(時憲曆)을 완성하였다. 순치제(順治帝)의 도움으로 포교에 종사하며 북경에 중국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대성당을 지었으나, 1664년 궁정 대신들의 모함으로 반역죄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한편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는 아담 샬과 친분을 맺어 천문 서적·과학 서적·천구의(天球儀) 등을 선물로 받고 서양 문물에 관한 이해를 높이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거처를 방문하며 대화를 나누었고 서신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변천

명나라와 청나라 이후로는 선교사들이 흠천감에 소속되어 황실의 천문을 살펴주고 그 사업을 통솔하였다. 흠천감이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친 것은 조선 세종대이다. 1425년(세종 7)에 이르러서는 물시계를 담당하는 금루(禁漏)를 분리하여 천문(天文) 20인, 금루 40인으로 하였다. 1433년에는 중국 흠천감의 예를 따라 다시 천문에 합속시켰다. 특히 시헌력이라 불리는 서양 역법을 사용하면서부터는 흠천감과의 교섭이 적극적이었다. 1644년(인조 22) 관상감(觀象監) 제조(提調)김육(金堉)이 시헌력을 채용할 것을 상소하였으며, 직접 청나라에 가서 아담 샬에게서 시헌역법에 관한 서적을 구하여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 후, 김상범(金尙范)에게 시헌력을 연구하도록 했으며, 1651년(효종 2) 김상범은 청의 흠천감에 교섭하여 시헌역법을 배워오기도 했다.

그러나 오성(五星)의 계산법을 완전히 해득하지 못하였으므로, 1655년(효종 6)에 또다시 연경으로 갔으나 불행히도 도중에서 사망하였다. 하지만 시헌역법은 시일이 지남에 따라 점차 그 내용이 밝혀졌다. 1708년(숙종 34) 처음으로 시헌력 오성법(五星法)을 썼는데, 이것은 앞서 관상감 추산관(推算官) 허원(許遠)이 청나라 연경에 들어가 시헌법칠정표를 흠천감에서 얻어와 썼다.

참고문헌

  • 『서운관지(書雲觀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 Needham, Joseph.,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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