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안전(會安殿)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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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회안전 |
한글표제 | 회안전 |
한자표제 | 會安殿 |
상위어 | 경복궁(景福宮), 혼전(魂殿) |
관련어 | 문경전(文慶殿), 태원전(泰元殿) |
분야 | 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조재모 |
장소 | 경복궁 |
규모(정면/측면/칸수) | 정면 3칸/측면 4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회안전(會安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27년 9월 19일 |
경복궁 북쪽의 태원전 일곽에 있었던 전각.
개설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시설로 대표적인 것이 태원전(泰元殿), 회안전(會安殿), 문경전(文慶殿) 등 경복궁 서북쪽의 빈전(殯殿), 혼전(魂殿) 용도의 전각군이다. 회안전은 문경전 북쪽, 태원전 남쪽에 별도로 조성된 전각으로 전후면에 복도각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문경전과 형태가 거의 같다.
위치 및 용도
태원전 일곽은 궁역 내를 관통하여 흐르는 물길에 의해 타 영역과 분리되었다. 남쪽으로부터 문경전, 회안전, 태원전 영역이 각각 구성되었다. 회안전은 중앙부에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이 일대에 빈전, 혼전 용도의 전각이 조성된 것은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이다. 이전까지의 국상(國喪)에서는 5개월여의 빈전 의례, 22개월여의 혼전 의례가 통상 편전 등에서 이루어졌으나, 이로 인해 궁궐의 공간 사용에 심각한 변동이 일어날 정도의 영향이 있었다. 그래서 경복궁을 중건하면서는 별도로 빈전, 혼전 영역을 조성하고 대부분의 흉례 의식을 이곳에서 진행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용도로 처음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1890년(고종 27)의 신정왕후(神貞王后) 국상이었다. 다만 회안전은 주요하게 사용되지는 못하였고 혼전이 설치된 문경전의 보조 역할을 하였다.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상례에서는 문경전도 혼전으로 사용되지 못하여 회안전의 쓰임새는 실제로 적었다. 이곳의 빈전, 혼전 영역으로서의 운영은 이후 경운궁(慶運宮)에서도 계승되어, 1904년(광무 8)에 순종 비가 승하했을 때 문경전과 회안전을 경운궁 북서쪽 영성문(永成門) 안으로 옮겨 지어 사용한 바 있다.
변천 및 현황
회안전은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조성된 혼전 용도의 전각이며, 이후 경운궁의 흥복전(興福殿)으로 옮겨 지었다.
형태
「북궐도형(北闕圖形)」을 기준으로 보면 회안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모습이다. 동쪽의 문경전과 유사하나 측면 어칸이 크게 묘사되었다. 전면으로는 7칸의 복도, 후면으로는 2칸의 복도가 묘사되었다. 각각 남행각과 북행각에 연결되었다. 동·남·북쪽으로는 행각으로 구획되었고, 서쪽으로는 담장으로만 구획되었다. 도형에도 경운궁으로 옮겨지었다고 기록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북궐도형」보다 이른 시기의 배치도인 「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에는 문경전과 회안전의 위치가 서로 바뀌어 기재되었다는 것이다. 여러 기록으로 보아 원래 문경전이 회안전의 서쪽에 위치하였는데, 1888년(고종 25)~1890년에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대부분의 문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890년(고종 27)에 청에서 내린 제사를 받을 장소로 회안전을 선택하였다. 칙사의 숙소는 마포의 세심정(洗心亭)으로 정하였다(『고종실록』 27년 9월 19일).
참고문헌
- 「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
-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문화재청, 2009.
- 이철원, 『왕궁사』, 동국문화사, 1954.
- 이혜원, 「경복궁 중건 이후 전각구성의 변화」,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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