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기(黃土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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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황토기 |
한글표제 | 황토기 |
한자표제 | 黃土岐 |
상위어 | 병영(兵營), 방어영(防禦營), 진(鎭) |
관련어 | 남관(南關), 진보(鎭堡)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송양섭 |
장소 | 함경도 갑산군(甲山郡) |
규모(정면/측면/칸수) | 둘레: 1,031척 |
관련 인물 | 정원용(鄭元容)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황토기(黃土岐)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경종실록』 3년 4월 13일, 『정조실록』 13년 7월 14일 |
조선시대 함경도 갑산군에 설치한 군사시설인 보(堡).
개설
함경도는 조선초기부터 여러 진보를 설치하여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고 지역사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황토기가 소속돼 있는 갑산군(甲山郡)은 본래 허천부(虛川府)였는데, 조선초기에는 호인(胡人)들에게 점거되어 여러 차례 병화를 겪으면서 거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고려시대에 갑산만호부였던 것이 조선에 와서 1413년(태종 13)에 갑산군으로 고쳐졌다. 황토기는 갑산군에서 동남쪽 산간 지역의 도로 주변에 설치되어 내지로 내려가는 외적을 감시하고 연락을 주고받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위치 및 용도
갑산군의 동남쪽 방향으로 90리(약 35.3㎞)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단천군(丹川郡)과의 거리가 230리(약 90.3㎞) 정도였다. 갑산군에서 내지로 가기 위해 남쪽으로 허천을 지나 내려오면 운허원(雲虛院)에서 길이 북청(北靑) 방향과 길주(吉州) 방향으로 갈라졌는데, 황토기는 길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험한 황토령(黃土嶺) 고개를 넘으면 바로 만나는 곳이 황토기였다. 황토기는 험준한 곳에 있었지만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보를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조선시대 진보의 역할은 적 침입 시 일차적으로 방어를 하며, 평시에는 각지에 있는 파수(把守)와 봉수(烽燧)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함경도의 방어체제는 기본적으로 북병영(北兵營)·남병영(南兵營)-주진관(主鎭管)-진보(鎭堡)-파수(把守)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이와 같은 체제상에서 진보는 요충지를 실제적으로 방어하는 가장 핵심적인 군사시설이었다.
변천 및 현황
황토기보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조선전기 연대기 자료에서는 보이지 않는 지명이지만, 황토기가 있었던 지역이 이전부터 교통로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른 시점부터 방어시설이 구축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1723년(경종 3)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황토기가 황토령 아래에 있는 쌍청(雙靑)과 서로 보호하니 모두 옮길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경종실록』 3년 4월 13일). 황토기보는 1850년(철종 1) 영의정정원용(鄭元容)의 건의에 따라 혁파되었다.
형태
『대동지지』에 따르면 황토기보의 성은 둘레가 1,031척(약 312.4m)이었으며, 권관이 통솔하는 진보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89년(정조 13) 함경도 지역에 극심한 흉년이 들자 대규모 진장(賑場)을 설치하고 진휼을 펼쳤다. 이때 남관(南關)에는 1월부터 진휼을 시작해서 윤5월에 마치고, 북관에는 1월부터 진휼을 시작해서 6월에 마쳤는데, 황토기 등 남관의 여러 진에서 진휼을 받은 기민의 총수가 29만 6508명이고, 진휼한 곡식만 2만 9985석이었다(『정조실록』 13년 7월 14일).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 육진지역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고승희, 「함경도 내지 진보의 변화」,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노영구, 「조선후기 함경남도 간선 방어체계」,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