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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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황성기독교청년회 |
한글표제 | 황성기독교청년회 |
한자표제 | 皇城基督敎靑年會 |
대역어 | YMCA(기독교청년회) |
상위어 | 기독교청년회 |
하위어 | 황성기독교청년학관(皇城基督敎靑年學館) |
관련어 | 서울기독교청년회(서울基督敎靑年會),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朝鮮中央基督敎靑年會), 태화궁(太華宮), 유신회(維新會) |
분야 | 문화/종교/천주교·기독교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대한제국 |
집필자 | 목수현 |
폐지 시기 | 1913년 4월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
1903년 서울에 창설된 기독교 청년 단체.
개설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는 오늘날 서울기독교청년회의 전신으로 헐버트 등 미국 선교사를 비롯하여 5개국 출신의 37명이 창립 회원으로 참여하여 1903년에 결성되었다. 종교 단체로 출발하였으나 계몽 운동가들의 참여로, 대한제국기에 청년들의 교육과 사회 활동에 기여하였다. 한일합방 이후 1913년에 일본YMCA 산하가 되어 활동을 마감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기독교청년회(YMCA)는 1844년 런던에서 결성되어 유럽 및 북미로 퍼져나가 1850년대 이후 미국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한국에서는 기독교 청년 단체로 1896년 배재학당 선비들이 조직한 협성회와, 상동교회 청년들이 1897년에 결성한 엡윗청년회 등이 있었다. 상류 기독교 인사들은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등과 협의하여 1899년 세계YMCA에 한국지부 설립을 청원하였고, 기독교청년회 국제위원회에서는 1901년 9월에 질레트(Gillett)를 창설 간사로 한국에 파송하였다. 1903년 10월 28일 서울 유니온회관에서 28명의 정회원과 9명의 협동회원으로 황성기독교청년회가 결성되었다. 이때 선출된 12명의 이사 가운데에 질레트는 물론 게일과 헐버트, 맥리비 브라운 등이 있었으며 한국인으로는 여병현(呂炳鉉)과 김필수(金弼秀)가 참여하였다. 초대회장에는 헐버트(Hulbert, H. B.)가 선임되었다. 1904년에는 이상재(李商在), 김정식(金貞植), 이원긍(李源兢) 등 독립협회 및 중인 출신의 지식인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의 참여로 말미암아 황성기독교청년회는 선교사들의 선교 목적과는 별도로 교육과 계몽에도 힘을 기울였다.
조직 및 역할
황성기독교청년회는 이사회인 사사부(司事部)를 비롯하여 재정부, 의사부(議事部), 교육부, 종교부, 운동부, 친접부(親接部) 등 각종 위원회와 교사부로 구성되었다. 이사회의 제1대 회장은 게일, 부회장은 헐버트, 총무는 질레트, 부총무는 브로크만(Brockman, F. M.)이 맡았고, 한국인 간사로는 김린(金隣), 최재학(崔在鶴), 육정수(陸定洙), 이태순(李台淳) 등이 활동하였다. 뒤에 윤치호(尹致昊)와 김규식(金奎植)이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특히 윤치호는 1906년 이후에 부회장으로 재임하였다.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는 현재의 종로구 인사동인 옛 태화궁(太華宮) 터에 회관을 마련하였는데, 현흥택(玄興澤)이 토지를 기부하고, 미국인 부호 워너메이커(Wanamaker, J.) 및 각처에서 기부금을 받아 건립하였다. 황성기독교청년회관은 960평의 부지에 600평 면적으로 벽돌로 지은 3층 양옥 건물로, 1907년 5월부터 신축을 시작하여 1908년 12월 3일에 개관식을 가졌다.
이 단체는 특히 교육에 큰 관심을 두어 1906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학관(皇城基督敎靑年學館)을 설치하고 학관에서는 1907~1908년경 보통과뿐 아니라 어학과, 공업과, 상업과 외에 야학과 등을 두었고, 운동회, 사경회(査經會), 환등회(幻燈會)와 같은 사업도 실시하였다. 따라서 황성기독교청년학관에는 한때 학생이 1,800여 명에 이르기도 하였으며 황실에서도 지원금을 하사하여 교육 활동을 후원하였다.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는 1906년 1월부터 각종 연설회 및 토론회도 활발히 열었는데, 선교사 및 지식인들을 초청하여 종교와 관련된 것뿐 아니라 지구, 농학, 교육과 정치, 미국 대통령의 사적 등 국제사회의 동향과 근대적인 국가 건설에 도움이 되는 주제를 강연하였다. 1908년경에는 회원이 1,160명으로, 종교 활동과 관련된 집회에 참가한 인원이 연 2만명, 강연회 등 각종 프로그램의 참가자는 연 5만명을 넘어섰다.
변천
1910년 8월에 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 황성기독교청년회의 활동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11년에는 제1대 조선총독데라우치를 암살하려 했다는 이른바 105인 사건이 일어나 이 사건으로 윤치호가 체포되었으며, 이 사건을 세계에 폭로한 질레트는 추방당하였다.
일제는 1913년 초에 김린, 사일환(史一煥), 유일선(柳一宣) 등 친일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유신회(維新會)라는 단체를 조직하게 하고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일본YMCA에 소속시키고자 하였다. 그 결과 황성기독교청년회는 1913년 4월에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朝鮮中央基督敎靑年會)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일본YMCA의 산하에 놓이게 되었다. YMCA 활동은 계속되었지만, 황성기독교청년회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참고문헌
-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 『황성신문(皇城新聞)』
- 민경배, 『서울YMCA운동 100년사 : 1903~2003』, 서울YMCA,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