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산성(黃石山城)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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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황석산성 |
한글표제 | 황석산성 |
한자표제 | 黃石山城 |
상위어 | 산성(山城) |
관련어 | 함양군(咸陽郡), 피바위, 포곡식(包谷式) 산성,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곽낙현 |
장소 |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
관련 인물 | 이원익(李元翼), 백사림(白士霖), 조종도(趙宗道), 곽준(郭䞭)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황석산성(黃石山城)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31년 1월 5일 |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에 있던 산성.
개설
삼국시대 6세기 후반부터 축조된 산성으로 고려를 거쳐 조선 초 태종대에 수축된 바가 있고 영·호남을 잇는 전략상의 요충지로 중시된 곳이다.
위치 및 용도
소백산맥을 가로지르는 육십령(六十嶺)으로 통하는 관방(關防)의 요새지에 축조된 삼국시대부터의 고성이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초기에 수축한 바 있고,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선조 때에 커다란 싸움이 있었던 유서 깊은 성터로서 전략상의 요충지이다.
변천 및 현황
이 성이 언제 처음 축조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벽의 구조로 보아서는 신라가 가야를 아우르고 백제와 대결하게 된 6세기 후반경으로 추측된다. 그 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들어 1410년(태종 10)에 고쳐 쌓았고, 이후 전략상의 요충지로서 중시되었다.
1597년(선조 30) 왜군이 다시 침입하자 도체찰사이원익(李元翼)은, 이 성이 호남과 영남을 잇는 요새이므로 왜군이 반드시 노릴 것으로 판단하여 인근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김해부사백사림(白士霖)이 성을 넘어 도망하자 왜군이 난입하여 끝까지 싸우던 함양군수조종도(趙宗道)와 안음현감곽준(郭䞭)은 전사하였다(『선조실록』 31년 1월 5일). 지금도 당시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피바위가 남아 있다. 성안에는 작은 계곡이 있어 물이 마르지 않아 전략적 가치가 큰 곳임을 알 수 있다. 석벽은 토루가 많고 석축은 납작한 할석을 이용하여 축성하였는데, 현재 남동북 성문터가 남아 있고, 치성(雉城)의 흔적도 일부 보인다.
형태
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둘레 2.5㎞, 높이 3m로, 해발 1,190m의 황석산 정상에서 좌우로 뻗은 능선을 따라 쌓은 고성이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문화유적총람』하, 문화재관리국, 1977.
- 박선호, 『황석산성 전투와 임진대전쟁』, 서경문화,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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