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원역(和原驛)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함경도 영흥에 위치했던 역.

개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화원역(和原驛)은 영흥대도호부(永興大都護府) 동쪽 4리(약 1.6㎞)에 위치해 있었다. 화원역은 고려시대에도 존재하였는데, 당시에는 삭방도(朔方道)에 소속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화원역은 고산도(高山道)의 소속 역(驛)으로 편성되었다.

내용 및 변천

화원역은 고려시대에도 화주(和州: 현 영흥)에 위치했다. 『고려사(高麗史)』「병지(兵志)」 참역(站驛) 조에 의하면, 화원역(和遠驛) 혹은 지원역(知遠驛)이라는 명칭으로 삭방도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중 지원역의 ‘지(知)’는 ‘화(和)’의 오기인 것으로 여겨지므로, 고려시대에도 화원역이라는 명칭으로 존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함경도 지역의 역들은 남쪽의 안변 지역으로부터 북쪽의 두만강 연안에 이르기까지 해안가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편성된 교통로를 중심으로 설치, 운영되었다. 이 역들에 대한 역도(驛道) 편성은 몇 차례의 변동을 거친 후에, 고산도(高山道), 거산도(居山道), 수성도(輸城道) 등 3개의 역도로 정비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함경도의 역들이 모두 이 3개의 역도로 편제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화원역은 고산도 소속으로 기록되었으며[『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경국대전』과 『대전회통』에도 변함없이 고산도 소속으로 유지되었다.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고산도는 대체로 남쪽의 안변에서 북쪽의 함흥 사이에 위치한 역들로 편성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화원역에는 역리(驛吏)와 역노(驛奴), 역비(驛婢)가 1,370명, 상등마(上等馬) 5마리, 중등마(中等馬) 9마리, 하등마(下等馬) 16마리가 배속되어 있었다.

화원역은 남쪽으로는 고원·문천 방면, 북쪽으로는 정평·함흥 방면을 연결하는 한양~경흥간 간선 교통로상에 위치하였다. 화원역에서는 남쪽으로 통달역(通達驛), 북쪽으로 주천역(酒泉驛) 및 초원역(草元驛, 草原驛) 등과 연결되었다.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전국의 역들이 폐지되면서 화원역도 폐지되었다.

화원역의 위치는 현재 북한의 행정 구역으로, 함경남도 금야군 금야읍에 해당한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정요근,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 정요근, 「조선초기 驛路網의 전국적 재편」, 『조선시대사학보』46, 조선시대사학회, 2008.
  • 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한국평화문제연구소 공편, 『조선향토대백과사전』, 평화문제연구소, 200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