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위(洪瑋)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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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홍위 |
한글표제 | 홍위 |
한자표제 | 洪瑋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광해군~인조 |
집필자 | 이현숙 |
자 | 위부(偉夫) |
호 | 서담(西潭), 서한(西漢)『방목』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59년(명종14) |
사망 | 1624년(인조2) |
본관 | 남양(南陽)-당홍(唐洪) |
주거지 | 경상도 군위(軍威) |
묘소소재지 | 경상도 군위현(軍威縣) 함동(檻洞) |
증조부 | 홍의동(洪義同) |
조부 | 홍우식(洪禹軾) |
부 | 홍흔(洪訢) |
모_외조 | 남양홍씨(南陽洪氏)-토홍(土洪): 홍혼(洪渾)의 딸 |
처_장인 | 인씨(印氏): 인지신(印之信)의 딸 |
자녀 | (1자)홍종경(洪宗慶) (2자)홍선경(洪善慶) (3자)홍태경(洪泰慶) (1녀)박침(朴琛)의 처 (2녀)장정오(張正吾)의 처 (3녀)이시장(李時章)의 처 |
저술문집 | 『서담집(西潭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홍위(洪瑋) |
총론
[1559년(명종14)∼1624년(인조2) = 66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위부(偉夫), 호는 서담(西潭)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주거지는 경상도 군위(軍威)이다. 아버지는 증 한성부우윤홍흔(洪訢)이고, 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는 토홍(土洪)으로 생원 홍혼(洪渾)의 딸이다. 참봉홍우식(洪禹軾)의 손자이고, 서애(西厓)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8년(선조21) 30세로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에, 부모가 병이 나자 낙향하여 간호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전 한림(翰林)김해(金垓)와 생원 금응훈(琴應勳) 등이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전 현감이유(李愈)와 진사 권욱(權旭) 등이 예천(醴泉)에서 호응하자 그도 진사 이영남(李榮男)과 함께 군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593년(선조26) 체찰사(體察使)이원익(李元翼)에게 일본과 화의를 반대하고 왜적을 토벌하는 방책[斥和討賊策]을 건의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전쟁 중에 부모의 상을 연달아 당하였으나 예로써 상례를 치렀다. 전쟁 후, 1601년(선조34) 33세로 식년 문과에 병과 급제하였다.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통제영(統制營)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었는데, 통제사를 보좌하며 전비를 강화하였다. 1606년(선조39) 사헌부 감찰, 공조 좌랑과 예조 좌랑을 역임하였고, 1607년(선조40) 병조 좌랑이 되었는데, 청렴과 공정으로 봉직하였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09년(광해군1) 사간원 정언과 세자시강원 사서를 거쳐, 사헌부 지평으로 승진하였다. 그때 홍언문(洪彦文)이란 매우 사나운 오랑캐를 붙잡아 심문하다가 그를 장살(杖殺)하자, 파직되어 유배되었다. 석방되어 돌아온 후에, 광해군의 혼란한 정치를 보고는 후진을 가르치면서 칩거하였다. 1623년(인조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병조 정랑에 임명되었고, 이어 성균관 사예로 옮겼다. 그 해에 예천군수(醴泉郡守)로 나갔는데,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토민(土民)이 당로자(當路者)에게 그를 모함하는 바람에 체포되었다가 무고임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1624년(인조2) 8월 23일에 군위의 집에서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66세였다.
저서로는 『서담집(西潭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홍위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려서 책을 읽을 때 하찮은 말이라도 반드시 분명하게 해석한 뒤에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유성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자기가 수립한 뜻을 이룩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였으므로, 그 사람됨이 훌륭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벼슬에 나아가서 일을 논의할 때는, 의연하게 정도(正道)를 지키면서 구차스럽게 말을 바꾸거나 망령되게 남의 주장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단정한 자질과 염정(恬靖)한 지조를 지니고 있어 누가 이끌어주지 않아도 승진하였다. 그러나 두 번이나 근거 없는 모함을 당하여 그는 넉넉하게 온축(蘊蓄)한 학식을 미처 다 써보지 못했다. 그는 창석(蒼石)이준(李埈)과 막역한 친구 사이여서 항상 어깨를 나란히 하고 친하게 지냈다. 이준은 그의 비문에서 “예원(藝苑)에서는 그 문장이 화려하게 뛰어남을 사랑해서 상종(相從)했고, 조정에서는 그 지행(至行)이 방정함을 공경하여 나 자신을 굽히고 그와 사귀었다.”라고 회고하였다. 또 그는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 우복(愚伏)정경세(鄭經世) · 여헌(旅軒)장현광(張顯光)과도 가깝게 교유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군위현의 서쪽 함동(檻洞)의 언덕에 있는데, 창석이준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창석집(蒼石集)』 권16) 부인 인씨(印氏)는 선공감 역인지신(印之信)의 딸로 3남 3녀를 낳았는데, 차남 홍선경(洪善慶)은 의금부 도사를 지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난중잡록(亂中雜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서담집(西潭集)』
- 『창석집(蒼石集)』
- 『서애집(西厓集)』
- 『해사록(海槎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