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현(洪原縣)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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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홍원현 |
한글표제 | 홍원현 |
한자표제 | 洪原縣 |
동의어 | 홍헌(洪獻), 홍갱(紅坑), 홍긍(洪肯) |
관련어 | 북청진관(北靑鎭管), 전영장(前營將), 토포사(討捕使)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우철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홍원현(洪原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5년 6월 14일, 『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고종실록』 33년 8월 4일 |
조선시대 함경도 홍원 지방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홍원현(洪原縣)은 1402년(태종 2) 설치되어, 1895년(고종 32) 관제 개혁에 따라 홍원군(洪原郡)으로 바뀔 때까지 함경도 홍원 지방을 관할하는 행정구역으로 기능하였다. 진관(鎭管) 체제에서는 북청진관(北靑鎭管) 소속의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으며, 진영장(鎭營將) 체제에서는 전영장(前營將)으로서 토포사(討捕使)도 겸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구려의 영토였다가 진흥왕 때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 발해 때에는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에 속해 있었다. 발해가 망한 뒤로 오랫동안 여진(女眞)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1356년(고려 공민왕 5)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혁파한 뒤 회복되었다. 고려말에는 홍헌(洪獻)이나 홍갱(紅坑) 또는 홍긍(洪肯) 등의 이름으로 함주(咸州)의 속현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이 건국한 뒤 1398년(태조 7)에 홍원(洪原)으로 개칭하여 함흥부(咸興府)의 속현으로 삼았다. 1402년(태종 2)에 독립시켜 현령(縣令)을 설치했다.
조직 및 역할
조선초에 일시적으로 종5품의 현령이 수령으로 있다가, 다시 종6품의 현감(縣監)을 두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당상관(堂上官)이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상관의 임기는 30개월, 당하관은 60개월이었다. 현감에 직속된 이속(吏屬)으로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2명, 아전(衙前)·지인(知印) 60명, 사령(使令) 20명, 군뢰(軍牢) 22명, 관노(官奴) 36명, 관비(官婢) 45명, 소중군(小中軍) 1명, 천총(千摠) 1명, 파총(把摠) 1명, 초관(哨官) 7명, 기패관(旗牌官) 32명, 봉수별장(烽燧別將) 1명, 봉무사(烽武士) 100명, 가솔(假率) 70명, 친기위(親騎衛) 130명이 있었다.
조선전기 진관 체제에서는 북청진관 소속으로 현감은 병마절제도위를 겸하였으며, 조선후기 진영장 체제에서는 전영장으로서 토포사도 겸하였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홍원의 관할 행정구역으로는 신익사(新翼社), 노동사(蘆洞社), 부민사(富民社), 호현사(好賢社), 경포사(景浦社), 용원사(龍源社)의 6사(社)가 있었다.
변천
1402년(태종 2)에 현령을 두어 독립하였다가 곧 다시 혁파되어 함흥에 편입되었다. 1433년(세종 15)에 다시 현감을 설치하였다(『세종실록』 15년 6월 14일). 1680년(숙종 6)에 전영(前營)을 옮겨 설치하고, 영장과 토포사를 겸하도록 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인하여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가 대구역주의인 8도제에서 소구역주의인 23부제로 바뀌면서 함흥부(咸興府) 소속의 홍원군이 되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이듬해 다시 전국을 13도 8부 1목 331군으로 개편할 때 홍원군은 함경남도에 소속되었다(『고종실록』 33년 8월 4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손정목, 『한국지방제도·자치사연구(상)』, 일지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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