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라온(忽剌溫)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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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홀라온 |
한글표제 | 홀라온 |
한자표제 | 忽剌溫 |
동의어 | 홀온(忽溫), 홀자온(忽刺溫), 화라온(火剌溫) |
관련어 | 망가(忘家) 사건, 올적합(兀狄哈), 호륜(呼倫), 호륜(扈倫) |
분야 | 정치/외교/외교사안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중국 |
시대 | 명·청/조선 |
왕대 | 명·청/조선 |
집필자 | 이선애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홀라온(忽剌溫)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5년 2월 15일, 『세종실록』 14년 12월 21일, 『세종실록』 18년 9월 7일, 『세종실록』 18년 10월 6일, 『세종실록』 19년 8월 30일, 『세종실록』 24년 6월 10일, 『단종실록』 3년 3월 24일, 『선조실록』 38년 7월 6일 |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송화강 하류 일대의 올적합(兀狄哈) 계열의 여진족.
개설
홀라온이라는 명칭은 흑룡강성(黑龍江省)의 중부에 위치한 송화강(松花江)의 지류인 후란하[呼蘭河]에서 비롯되었다. 만주어로는 훌룬([扈倫, 呼倫], hūlun)이다. 홀온(忽溫)·화라온(火剌溫)으로도 표기된다. 홀라온은 후란하를 중심으로 한 지명이었지만, 그 범위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에서는 대체로 이 지역에 거주한 올적합 여진인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홀라온은 세종 연간에 내조(來朝)하여 조선과 활발하게 교섭하였다. 16세기 초엽 이후 조선과 홀라온의 교섭은 이전만큼 활발하지 않았고 16세기 말 두만강 유역의 조선 번호(藩胡)들의 이반 현상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었다. 홀라온은 선조대 말에 조선의 북변을 공격하였는데, 이들은 울라([烏喇], ula)·하다([哈達], hada)·여허([葉赫], yehe)·호이파([輝發], hoifa) 등 훌룬 4부 중에서도 울라를 이른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홀라온은 후란하를 중심으로 거주한 나라([納喇], nara)씨 계열의 여진인 집단을 가리켰다. 홀라온에는 여러 계열의 여진족이 뒤섞여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데, 투메트([土默特], tumet) 몽고(몽골) 계열과 니마차([尼馬察, 尼馬車], nimaca)에 거주하던 익더리([益克得里], ikduri) 계열의 여진인들도 이 지역으로 이주하여 나라씨로 성을 바꾸고 함께 거주하였다. 홀라온 지역의 여진인들은 이후 남하하여 크게 4갈래로 나뉘었는데, 각각 정착한 지역의 명칭을 부족명으로 삼아 훌룬 4부라는 정치적 연맹체를 구성하였다. 이들 중에서도 울라는 홀라온의 정통을 이은 부족으로 조선 측 사료에는 계속해서 홀라온으로 나타나게 된다.
변천
조선은 홀라온의 거주지와 상당히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건국 초부터 별다른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세종실록』 15년 2월 15일). 조선이 처음 홀라온에 대한 관심을 보이게 된 것은 건주위(建州衛)의 추장 이만주(李滿住)가 평안도 여연 지방을 약탈한 홀라온 야인들로부터 조선인 포로를 빼앗아 조선에 보고하면서부터였다(『세종실록』 14년 12월 21일). 조선은 건주여진이 홀라온과 함께 모의한 것이라고 파악하면서 그 근거지인 파저강 일대를 정벌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435년부터 홀라온이 조선의 변경을 침범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렸고, 이듬해에는 회령(會寧)과 경원(慶源) 일대를 침범하는 사태가 실제로 벌어졌다(『세종실록』 18년 9월 7일)(『세종실록』 18년 10월 6일). 1437년 조선 조정에서는 홀라온이 다른 올적합 종족과 연계하는 것을 방지할 필요성이 논의되었고 귀순을 장려하는 방안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해 8월 홀라온 계열의 구한위(嘔罕衛) 지휘 내요곤(乃要昆)과 비하위(肥河衛) 지휘 벌아가(伐兒哥) 등이 사절을 보내어 내조하게 하였다(『세종실록』 19년 8월 30일). 이를 계기로 홀라온의 사절이 조선에 내조하는 경우가 급증하였다. 이 시기에 홀라온 지역에는 기상 이변이 속출하였고, 이를 타개할 목적으로 조선에서 경제적인 도움을 얻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홀라온의 내조는 1440년까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그 이후 홀라온의 일족임을 사칭하고 내조하였던 망가(忘家) 사건을 계기로 점차 줄어들었다(『세종실록』 24년 6월 10일). 이 사건 이후 조선은 홀라온의 내조를 엄격하게 제한하였고, 그 결과 양측의 교섭도 위축되었다. 1455년 함길도도체찰사이사철(李思哲)은 여진 부락의 종족과 강약의 등급을 보고하면서 홀라온은 거주지가 멀고 일찍이 귀순하지 않아서 파악하지 못하였다고 언급하였다(『단종실록』 3년 3월 24일). 이는 세종대에 활발히 전개되었던 조선과 홀라온의 교류가 한동안 단절되었음을 보여 준다.
홀라온은 세조대에 이르러 화라온(火剌溫)이라는 명칭으로 자주 등장하며 빈번히 내조하였다. 세조 또한 자신의 권위 신장을 위하여 홀라온의 내조를 적극적으로 권면하였다. 조선과 홀라온의 잦은 교섭은 성종대까지 이어졌으나, 연산군대 이후로는 거의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홀라온이 몽골의 동진으로 인하여 세력이 분기하면서 4부로 재정립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홀라온은 선조대에 이르러 재차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583년 두만강 육진 일대에서 발생한 여진 번호(藩胡)들의 이반 현상은 이들과 연관이 있는 것이었다. 이 시기 홀라온은 훌룬 4부 중에서도 울라부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홀라온의 추장 부잔타이([布占泰], bujantai)는 두만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번호들을 공략, 병합하는 한편 조선의 종성(鍾城)·동관(潼關) 등을 공격하였다[『선조실록』 36년 9월 3일 병진 3번째기사]. 홀라온의 군대는 1605년 3월에는 동관진(潼關鎭)을 재차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같은 해 5월 조선군을 종성 인근의 건퇴(件退)에서 격파하였다(『선조실록』 38년 7월 6일). 조선에서는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된 인물들을 송환하고 홀라온의 재차 공격을 방지하기 위한 교섭을 벌였고 직첩 100장을 내려 주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하였다.
17세기 초 홀라온의 부잔타이는 두만강 유역의 여진 번호들에 대한 관속권을 두고 건주여진의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와 경쟁하였다. 1607년 양측의 군대는 종성의 오갈암(烏碣巖)에서 전투를 벌였고, 홀라온이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를 계기로 두만강 유역의 여진 부락은 대부분 누르하치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갔고, 조선은 홀라온에게 지급하던 직첩과 녹봉을 누르하치에게 지급하게 되었다. 홀라온은 여러 차례 조선과 교섭을 시도하면서 세력을 만회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1613년 1월 누르하치에 의하여 병합되었다.
참고문헌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북로기략(北路紀略)』
- 『요동지(遼東志)』
-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 연구』, 경인문화사, 2014.
- 장정수, 「선조대 대여진(對女眞) 방어전략의 변화 과정과 의미」, 『조선시대사학보』 67, 2013.
- 賈敬顔, 「忽剌溫與忽剌溫野人」, 『黑龍江民族叢刊』, 1991年 1期.
- 王冬芳, 「地緣集團-忽剌溫卽烏拉部」, 『東北史地』, 2010年 4期.
- 王崇時, 「略說朝鮮 『李朝實錄』 中的忽剌溫野人」, 『明史論集』, 1993.
- 蔣秀松, 「略述忽剌溫野人對朝鮮的朝聘」, 『東北民族史硏究』 3, 1997.
- 河內良弘, 「忽剌溫兀狄哈之朝鮮來朝」, 『明代女眞史硏究』, 199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