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서청(湖西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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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대동법을 시행하면서 충청도에서 올라오는 대동세를 관리하던 선혜청의 부속 관서.

개설

대동법은 흔히 방납(防納)의 폐단과 민역(民役)의 불균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시행한 공납제 개혁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시행한 경기선혜법은 왕릉을 조성하는 데 동원되는 산릉역(山陵役)과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데 따른 조사역(朝使役)에 시달리던 경기민들의 역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하여 시행한 측면이 강하다.

1623년(인조 1년)에 시행된 삼도대동법(三道大同法)도 1618년(광해군 10) 이후 후금의 성장으로 모문룡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마련된 군량미 서량(西糧) 등 군량미를 마련할 필요성이 커지면서 중앙의 쌀 수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공물작미(貢物作米)의 일환으로 시행한 측면이 컸다.

삼도대동법은 1625년(인조 3) 이후 지역민의 반발로 인하여 결국 폐지되었으며, 병자호란이 종식되고 대내외 정세가 안정되자 인조대 말엽부터 대동법 시행 논의가 재개되었다. 1638년(인조 16) 충청도관찰사로 재임 중이던 김육(金堉)이 도내 결부수를 계산하여 결당 면포 1필과 쌀 2말씩을 내면 공물(貢物)의 값과 본도의 잡역인 전선(戰船), 쇄마(刷馬), 기타 관청 소비 물품이 모두 그 속에 포함되어도 오히려 남는 것이 수만이라고 하면서 호서대동법의 시행을 강력히 주장하였다(『인조실록』 16년 9월 27일). 그러나 당시에는 시행되지 못하고 1649년(효종 즉위년)에 김육이 재차 호서와 호남 지역에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가(『효종실록』 즉위년 11월 5일), 결국 1651년(효종 2)에 호서 지역에 먼저 대동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그 시행 관서인 호서청이 경기청과 강원청에 합설되었다(『효종실록』 2년 8월 24일).

설립 경위 및 목적

1651년(효종 2) 호서대동법을 제정하였다는 기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공법(貢法)이 무너져 서울에 있는 간교한 무리들이 경주인(京主人)이라고 칭하면서 각 도에서 공납하는 물품을 방납하고 그 값을 본읍(本邑)에서 배로 징수한다. (중략) 또 임진왜란 이후로 공안(貢案)이 더욱 문란해져서 계해년(1623년, 인조 1)에 강정(講定)하였으나 다과가 균등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매우 원망하였다. 그래서 60년 이래로 의논한 자들이 대부분 속히 개정해야 된다고 말하였다. (중략) 영의정김육이 대동법을 극력(있는 힘껏) 주장하였고, 또 충청도는 공법이 더욱 고르지 못하다고 하여 먼저 시험할 것을 청하였다.”는 내용으로 호서대동법 시행 취지를 밝히고 있다.

호서대동법의 의의는 방납의 폐단을 개선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보다 중요한 특징은 유치미(留置米)에서 찾을 수 있다. 대동세의 일부를 지방에 유치미로 보관해 두고 지방관수(地方官需)로 활용하도록 한 것이다.

현존하는 『호서대동사목』을 살펴보면, 임진년 수조안(收租案)을 근거로 충청도의 실결수를 총 124,746결 정도로 파악하고 있는데 여기서 매 1결당 미 10두(斗)를 거두면 총 83,164석가량을 거두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중 서울로 올려 보내는 쌀[京上納米]은 운송비[船馬價] 3,962석은 별도인 48,280석으로, 본도에 유치해 두는 쌀[本道留置米]은 30,922석으로 책정해 놓은 것은 이전의 경기·강원 지역의 대동법과 비교할 때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호서청도 경기·강원청과 마찬가지로 삼공(三公)이 도제조(都提調)를 예겸하고 제조(提調) 3명 중 호조 판서 1원이 제조를 예겸하도록 하였다. 또 낭청 4원을 두어 출납 업무를 분담시키되, 경기청과 상평청을 낭청 2원이 상호 겸찰하고, 호서청과 강원청도 낭청 2원이 상호 겸찰하도록 하였다. 이 밖에 산원과 서리·고직·사령을 두어 회계 처리와 문서 행정, 곡식 출납 및 보관 등의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대동법을 다른 도에 확대 시행하고 청사를 새로 합설하면서 낭청 이하 산원·서리 등이 겸찰하는 업무는 계속 조정되어 갔다. 또한 초기에 결당 10두로 거두던 대동세도 1673년(현종 14) 이후 12두로 상향 조정되었다.

변천

『호서대동사목』 작성 당시 호서청은 경기·강원청을 합설하여 삼도선혜청으로 출범하였다. 이후 대동법이 확대 시행되면서 각 도의 대동세를 관장하는 경기·강원·호서·호남·영남·해서청이 청사 내에 별도의 공간을 갖고 회계 업무도 독자적으로 운영해 나가는 합설기구로서의 성격을 유지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강원청사례(江原廳事例)』
  • 『호서대동사목(湖西大同事目)』
  • 이정철, 『대동법-조선 최고의 개혁』, 역사비평사, 2010.
  • 六反田豊, 『朝鮮王朝の國家と財政』, 산천출판사, 2013.
  • 문광균, 「영남대동법 시행 이후 대동세 배분방식의 변화와 儲置米 운영」, 『역사학보』 225, 2015.
  • 최주희, 「조선후기 宣惠廳의 운영과 中央財政構造의 변화-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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