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소(玄蘇)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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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현소 |
한글표제 | 현소 |
한자표제 | 玄蘇 |
동의어 | 경철현소(景轍玄蘇) |
관련어 | 기유약조(己酉約條), 규백현방(規伯玄方), 도서(圖書), 임제종(臨濟宗), 종의조(宗義調), 외교승(外交僧), 이정암(以酊庵), 이정암송사(以酊庵送使) |
분야 | 정치/군사·국방/전쟁 |
유형 | 인물 |
지역 | 일본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 |
집필자 | 장순순 |
이칭(자,호,봉작호,시호) | 선소(仙巢) |
성별 | 남 |
생년/일 | 1537년 |
몰년/일 | 1611년 10월 22일 |
출신지 | 축전국(筑前國) 종상군(宗像郡) |
관력 | 외교승(外交僧), 박다(博多) 성복사(聖福寺) 주지, 이정암(以酊庵) 주지 |
가족관계(부,조,외조[모], 장인[처], 형제) | 부: 하진융업(河津隆業)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현소(玄蘇)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13년 12월 21일, 『선조실록』 22년 6월 30일, 『선조실록』 24년 1월 13일, 『선조실록』 25년 4월 13일 |
일본 강호시대 초기에 조일 외교에 종사하였던 대마번의 외교승.
개설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강호시대(江戶時代) 전기에 살았던 임제종 환주파(幻住派)의 선승으로, 조일 외교업무에 종사하였던 대마번(對馬藩)의 외교승(外交僧)이다. 1580년에 대마에 이정암이라는 선사(禪寺)를 세웠다. 임진왜란 이후 조일 국교회복과 기유약조(己酉約條) 체결의 공로로 조선으로부터 1609년(광해군 1) 수도서인(受圖書人)으로 칭해졌으며 매년 조선에 이정암송사(以酊庵送使)를 파견하였다.
가계
자는 경철(景轍) 호는 선소(仙巢)이다. 1537년에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하진융업(河津隆業)으로 대대로 축전국(筑前國) 종상군(宗像郡)에 살았으며 대내씨(大內氏)의 가신 가문이었다고 한다. 그의 제자로는 규백현방(規伯玄方)이 있다.
활동 사항
현소는 1558년부터 1570년까지 박다(博多)의 성복사(聖福寺)의 주지를 지냈으며, 1580년 대마도로 건너가서 이정암이라는 사찰을 세웠다. 그가 속해 있던 종파는 선종의 중봉파(中峰派) 혹은 환주파(幻住派)인데 이 종파는 13세기에 중국 원나라 천목산(天目山) 환주암(幻住庵)의 중봉명문(中峰明文)에서 시작된 후 원계조웅(遠溪祖雄)에 의해 일본에 전해진 종파이다. 그 후 오산파(五山派)의 주류에서 갈라진 지방의 종파로서 오산파가 실정막부(室町幕府)의 쇠퇴와 함께 세력을 상실해 갔지만, 중봉파는 중국이나 조선과의 국제관계에 관련이 깊은 수호대명(守護大名)인 대내씨의 지지를 얻어 그들 가운데는 외교교섭에 기용된 승려가 많이 배출되었다.
1580년 종의조(宗義調)의 요청에 따라 일본국왕사로 조선에 파견되었다(『선조실록』 13년 12월 21일). 그 후 평생 동안 대마에 있으면서 대마 소속의 외교승이 되어 조선외교를 담당하였다. 1589년 강호 일본국왕사로 조선에 건너와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선조실록』 22년 6월 30일). 1590년 정사황윤길(黃允吉), 부사김성일(金誠一), 서장관허성(許筬) 등의 통신사 일행이 일본의 국정 탐색을 위하여 일본으로 갈 때 동행하였으며(『선조실록』 24년 1월 13일), 이듬해 다시 입국하여 조선의 국정을 살피고 풍신수길의 명나라 침공을 위한 교섭활동을 하였다.
임진왜란에서는 소서행장(小西行長)과 종의지(宗義智)를 따라 종군하기도 하였으며(『선조실록』 25년 4월 13일), 전쟁 중 일본과 명나라 간의 강화교섭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덕천가강(德川家康)의 명에 따라 대마도주 종의지와 함께 대조선 교섭에 임하여 조일 국교회복을 주선하였다. 1604년 7월 일본의 국정탐색을 위해 대마에 파견된 손문욱(孫文彧)과 유정(惟政, [松雲大師])이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京都)를 거쳐 복견성(伏見城)에서 덕천가강, 덕천수충(德川秀忠)과 면담하였을 때 종의지, 유천조신(柳川調信)과 함께 안내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1609년 조선에 건너와 기유약조의 체결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조선에서는 현소에게 1609년(광해군 1) 현소의 호 선소(仙巢)를 딴 ‘선소도서(仙巢圖書)’가 지급되어, 1611년(광해군 3)부터 사선이 도항하였는데 이를 이정암송사(以酊庵送使)라고 부른다. 1611년 현소가 사망한 후 그의 제자인 승 규백현방(規伯玄方)이 도서를 세습하여 사용하였지만, 국서개작사건인 유천일건(柳川一件)으로 현방이 벌을 받게 되면서 1635년 3월에 조선에 도서가 반환되었다. 그러나 1638년(인조 16) 종씨가 조선에 이 도서의 재발급을 요청하여 다시 도항이 이루어졌고, 종씨의 관리하에 놓이게 되었다. 도서는 당시 조선 정부가 합법적으로 통교할 수 있도록 대마도주와 일부 호족에서 발급해주던 인장이다.
현소는 1611년 10월 22일에 대마의 부중(府中)에 위치한 이정암에서 7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대마시의 서산사(西山寺)에는 현소와 그의 제자인 현방의 목상(木像)이 소장되어 있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는 제자인 현방이 편찬한 『선소고(仙巢稿)』 3권이 있다.
묘소
장기현(長崎縣) 대마시(對馬市) 엄원정(嚴原町)의 국분(國分) 서산사(西山寺)
참고문헌
- 田代和生, 『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 創文社, 1981.
- 伊藤幸司, 『中世日本の外交と禪宗』, 吉川弘文館, 2002.
- 長正統, 「景轍玄蘇について-外交僧の出自と法系-」, 『朝鮮學報』29, 朝鮮学会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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