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승첩(幸州勝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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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2월에 한양 수복 작전의 일환으로 행주산성에 진을 친 조선군을 일본군이 공격해 오자 이를 크게 물리친 전투.

개설

명의 참전으로 평양성을 수복하면서 임진왜란의 전세는 조·명연합군이 일본군을 압박하는 형국으로 전황이 바뀌었다. 비록 명군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퇴하기는 했어도, 조·명연합군은 한양의 일본군을 북쪽·서쪽·남쪽에서 느슨하게 포위하며 압박을 가하는 형세를 이루었다. 이때 전라도순찰사권율(權慄)이 이끄는 조선군도 한양의 서쪽과 남쪽에 진지를 구축했다. 행주산성은 그 가운데 하나로, 권율은 약 2,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이런 형세에 위협을 느낀 일본군은 1593년 2월 12일 새벽에 약 30,000명의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해 옴으로써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하루 낮과 밤을 이어 벌인 전투에서 권율의 조선군이 일본군을 물리침으로써, 일본군이 결국 한양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퇴각하는 데 전략적으로 기여했다.

역사적 배경

평양 수복은 조·명연합군이 전황을 뒤집어 총반격을 감행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러나 한양의 수복을 목전에 두고 명군이 벽제관에서 패퇴한 탓에 한양 수복이 여의치 않게 된 상황에서, 남쪽에서 한양을 향해 진군한 권율 휘하 10,000여 명의 조선군은 한양의 남쪽과 서쪽에 진을 치면서 한양의 일본군을 느슨하게 포위하는 형국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모두 물리쳤다. 1593년 2월의 행주승첩은 석 달 전인 1592년 12월에 있었던 수원 부근의 독성산성(禿城山城) 전투와 같은 성격의 전투로, 모두 조선군의 포위망을 무너뜨리기 위해 선공해 온 일본군을 격퇴한 전투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행주승첩은 벽제관 전투 이후 사기가 오른 일본군을 다시 꺾음으로서 결국에는 스스로 한양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총퇴각하게 만드는 데 전략적으로 기여한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

발단

1592년 여름에 이치(梨峙) 전투에서 승리한 전라도순찰사권율은 호남에서 모집한 10,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그해 겨울에 한양을 향해 북상해 수원의 독성산성에 진을 치고 한양의 일본군을 배후에서 위협했다. 당시 권율의 휘하에는 전라도병사선거이(宣居怡), 전라도조방장조경(趙儆), 전라도소모사변이중(邊以中), 의병장 변사정(邊士貞)과 임희진(林希進), 그리고 승병 지휘관 처영(處英) 등이 포진했다. 이에 일본군이 공격해 왔으나 조선군은 독성산성 전투에서 그들을 격퇴했다. 권율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조선군을 전진배치하면서, 조경의 건의를 받아들여 지금의 덕양산에 목책을 이중으로 세워 행주산성에서 진지를 구축했다. 또한 선거이와 변이중에게 각각 군사 4,000을 주어 시흥 일대 광교산(光敎山)과 양천현(陽川縣)에 진을 치게 함으로써 행주산성과 두 지역이 마치 사슴을 잡을 때 사슴 뒷발을 잡고 뿔을 잡는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어 전방위로 일본군을 압박했다. 권율 자신은 조경과 처영 등과 함께 직접 2,300여 군사를 이끌고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조선군의 이런 움직임에 위협을 느낀 한양의 일본군 수뇌부는 한양의 안위를 위해 행주산성의 조선군을 먼저 치기로 결정하고, 약 30,000의 병력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행주승첩은 바로 이런 일본군의 대공세를 물리친 전투였다.

경과

2월 12일 동틀 무렵에 일본군의 접근을 탐지한 권율은 병사들에게 전투태세를 갖추게 하고, 적이 30보 거리로 근접할 때까지는 쏘지 말도록 명했다. 일본군의 선봉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끄는 제1대는 산성에 접근하자 조총을 쏘며 돌진했다. 권율은 그들을 성책의 몇 보 앞까지 오게 한 다음에 비로소 큰북을 연타로 울려 접전을 명했다. 이에, 화차와 수차석포가 일제히 발사되고, 화살도 적군을 행해 빗발쳤다. 조선군의 공격을 뚫지 못한 일본군은 적지 않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이어서 석전삼성(石田三成)이 이끄는 제2대가 돌격해 왔는데, 이번에도 조선군은 목책 안으로부터 연이어 화살을 쏘아, 접근하는 일본군을 물리쳤다. 이어 흑전장정(黑田長政)이 이끄는 제3대는 성을 공략하기 위한 누대를 만들고 그 위에 총수 수십 명을 올려서 성안을 향해 조총을 쏘게 하면서 조선군의 사정거리 밖에서 공격해 왔다. 그러나 조방장조경의 지휘를 받는 조선군은 화포로 일본군의 누대를 깨뜨리고 화차를 쏘아 일본군을 격퇴했다.

일본군 총대장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가 이끄는 제4대가 희생을 무릅쓰고 직접 돌진을 감행해오자, 조선군은 힘껏 싸웠으나 제1성책의 조선군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성책 주위에서는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이 와중에 일부 일본군이 제2성책까지 접근하기도 했으나, 대개 제1성책 안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조선군의 화차가 적장 우희다수가를 넘어뜨렸고, 다른 부관들에게도 부상을 입혔다. 이에, 제1성책을 넘어왔던 일본군은 부상당한 지휘관들을 데리고 모두 물러갔다. 뒤를 이어, 길천광가(吉川廣家)가 이끄는 제5대가 방어선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제1성책을 지나 산 위를 향해 접근하면서 전투는 계속되었다. 일본군의 화공으로 제2성책에 불이 붙자, 조선군은 미리 준비해 둔 물로 진화하는 한편, 이전처럼 화살과 돌을 연달아 쏘며 대응했다. 그중 화살 하나가 길천광가에 명중하자, 일본군은 약 160여 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황망히 물러갔다. 모리원강(毛里元康)이 이끄는 제6대는 우회공격을 감행했으나, 처영이 이끄는 승군(僧軍)이 격퇴했다.

오전 6시 무렵에 시작된 전투는 오후 6시가 되도록 거의 쉴 틈도 없이 전개되었다. 해가 저물도록 조선군은 여전히 제2성책을 고수하고 있었으며, 일본군은 제1성책은 무너뜨렸으나 이렇다 할 전과가 없이 피해만 늘어가는 형국이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60세 노장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이 이끄는 제7대가 선두에 서서 서북쪽 자성(子城)을 지키던 승군 진영에 총공세를 가해왔다. 조선의 승병들이 계속 분전했으나 마침내 그쪽의 제2성책이 뚫리면서 일본군이 성책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제2성책의 안쪽과 내성의 방어선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전투의 승패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화살이 거의 떨어져가자, 조선군은 진중에 있는 크고 작은 돌들을 모아 투석전을 벌였다. 그렇지만 날아오던 화살이 멈추고 조그만 돌들로 바뀌자 일본군은 조선군의 화살이 다한 줄 알고는 더욱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때맞춰 다른 조선군이 화살을 가득 실은 배 두 척을 몰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적의 후방을 찌를 기세를 보이자, 후방의 퇴로를 차단당할 것을 우려한 일본군은 마침내 퇴각했다.

당시 일본군은 총퇴각을 하면서 네 곳에 일본군의 시체를 쌓고 불태웠는데, 그 타는 냄새가 10리 밖에까지 코를 찔렀으며, 산 아래에는 일본군이 버리고 간 기치와 창검과 갑주들과 기타 자재들이 수없이 흩어져 있었고 피가 낭자했다. 다음 날 점검한 결과, 주요 노획품이 727건이고, 유기된 적군의 시체가 200을 넘었으며, 타다 남은 시체는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웠다.

참고문헌

  • 『국조보감(國朝寶鑑)』
  •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
  • 『난중잡록(亂中雜錄)』
  • 『백사집(白沙集)』
  • 『선묘보감(宣廟寶鑑)』
  • 『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풍양공조경비명(豊穰公趙儆碑銘)』
  • 『행주권도원수승첩비문(幸州權都元帥勝捷碑文)』
  • 이장희, 『임진왜란사연구』, 아세아문화사, 1999.
  • 이형석, 『임진전란사』, 임진전란사간행위원회, 1976.
  • 강성문, 「행주대첩에서의 권율의 전략과 전술」, 『임진왜란과 권율장군』, 전쟁기념관,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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