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골선(海鶻船)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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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해골선 |
한글표제 | 해골선 |
한자표제 | 海鶻船 |
관련어 | 통영(統營), 수영(水營), 군선(軍船), 관방(關防), 무경절요(武經節要), 전운상(田雲祥) |
분야 | 정치/군사·국방/병기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이왕무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해골선(海鶻船)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16년 윤6월 18일 |
1740년(영조 16)에 전라좌수사전운상이 만든 병선.
개설
해골선(海鶻船)은 전라좌수사전운상(田雲祥)이 『무경절요(武經節要)』에 있는 것을 본받아 만든 병선이다. 전운상은 1694년(숙종 20)에 홍주영장전시원(田始元)의 장남으로 태어나 1717년 무과에 급제했다. 1738년(영조 13) 공충도수사, 1739년 전라좌수사, 1744년 어영청 천총, 1745년 강도중군, 1746년 경상도좌병사, 1754년 오위도총부 부총관이 되었으며, 1760년(영조 36) 회령부사로 재임하던 중에 67세로 사망했다. 관리로서의 경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관방의 일선에서 실무를 발휘한 무관이었으며, 그런 경험에서 해골선을 만들었다.
내용 및 특징
1740년(영조 16)에 해골선이 완성되었다. 당시 영조는 통영(統營)과 각 지방의 수영(水營)에 해골선을 만들라고 명하였다. 이때 전라좌수사전운상이 해골선을 만들었는데, 몸체는 작지만 가볍고 빨라서 바람을 두려워할 걱정이 없었다(『영조실록』 16년 윤6월 18일). 특히 선체가 작았기 때문에 통영과 각 도의 수영에 소재한 병선이 오래되었을 경우 해골선 1척씩을 만들어 두도록 했다.
해골선은 머리 쪽이 낮고 꼬리 쪽이 높으며 앞이 크고 뒤가 작아 바다 송골매인 해골의 모양과 같았다. 뱃전 위 좌우에는 부판(浮板)을 두 날개를 펼치듯이 설치하고 소가죽을 성(城)의 형태로 벌여 해상의 파도가 심해도 뒤집힐 우려가 없고, 매우 가볍고 빨랐다. 또한 배의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크기는 거북선보다 작았다.
해골선을 만든 전라좌수영은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든 곳이기도 하다. 조선의 전선(戰船)은 삼층의 판옥선으로 배의 사방을 방패로 둘러친 크고 무거운 배였기 때문에 풍랑을 만나면 위험하여 원양 항해가 어려웠다. 따라서 해골선처럼 선체가 날렵하고 풍랑에 관계없이 적정을 살필 수 있는 병선이 필요했다. 해골선은 외부에서 노군, 격군, 전투원을 볼 수 없어서 전투 시 승무원이 안전했다.
변천
영조의 명에 따라 전라좌수영에서 만든 해골선을 전국적으로 배치하였다. 해골선이 처음 등장한 지 2년 뒤인 1746년(영조 22)에 반포한 『속대전』에 의하면 해골선은 경기도 3척, 전라도 1척, 황해도 21척, 평안도 1척으로 모두 26척이 있었다. 황해도에 21척을 배치한 것으로 해골선의 기능을 명확히 알 수 있다. 황해도는 황당선과 중국의 배들이 불법 고기잡이와 밀무역을 위해 늘 출몰하는 곳이어서 선체는 작으나 속도가 빠르고 안정적인 해골선이 필요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속대전(續大典)』
- 『만기요람(萬機要覽)』
- 金龍國, 「田雲祥과 海鶻船」, 『學術院論文集』13, 197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