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부(咸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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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의 감영 소재지인 함흥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함흥부(咸興府)는 1416년(태종 16)에 성립되어 1910년(순종 3) 일제강점기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함흥군(咸興郡)으로 변경되기까지, 읍호(邑號)가 강등되었던 일부 시기를 제외하고 지속적으로 함경도를 관할하는 행정·군사 중심 지역으로 기능하였다. 부윤(府尹)은 역시 일부 시기를 제외하고는 함경도관찰사와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를 겸임하면서, 함흥 지방은 물론 함경도 전체의 행정과 군사를 총괄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구려의 옛 땅으로 오랫동안 여진(女眞)의 지배 아래 있다가, 고려 1107년(고려 예종 2) 윤관(尹瓘)이 여진을 몰아내면서 우리 민족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1108년(고려 예종 3)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를 설치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나중에 원(元)나라에 흡수되어 합란부(哈蘭府)라 불리며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에 편입되었다. 1356년(고려 공민왕 5)에 쌍성총관부를 혁파하고 지함주사(知咸州事)를 삼았다가, 곧 만호부로 고쳐 강릉·경상·전라 등 도(道)의 병력을 모아다가 변경을 지켰다. 1369년(고려 공민왕 18)에 목(牧)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이 건국한 뒤, 1416년(태종 16)에 함흥(咸興)으로 이름을 바꾸고 부(府)로 승격시켜 관찰사의 본영(本營)으로 삼고, 토관(土官)을 두었다(『태종실록』 16년 9월 9일).

조직 및 역할

부윤은 문관 종2품으로 함흥의 행정을 총괄하는 동시에 관찰사를 겸하여 함경도의 행정과 군사 업무를 총괄하였다. 음관(蔭官) 종5품으로 보임하는 판관(判官)이 부윤의 행정업무를 보좌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판관에 직속된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3명, 가솔(假率) 891명, 봉무사(烽武士) 400명, 토관(土官) 17명, 호장(戶長) 1명, 인리(人吏) 59명, 연직(硯直) 43명, 서원(書員) 24명, 의생(醫生) 3명, 면주인(面主人) 44명, 일수(日守) 60명, 사령(使令) 29명, 쇄장(鎖長) 9명, 노자(奴子) 87명, 비자(婢子) 105명이 있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종6품의 교수(敎授) 1원을 두었는데, 『속대전(續大典)』에서 폐지되어 『여지도서』에 따르면 고산찰방(高山察訪)이 교양관(敎養官)을 겸임하였다.

남쪽 지방과 달리 함경도와 평안도에는 토관으로 몇 개의 행정기구가 설치되었다. 도무사(都務司)에 종5품의 도무(都務), 종6품의 감부(勘簿), 정8품의 관사(管事) 각 1원을 두었으며, 전례서(典禮署)에 종5품의 장부(掌簿), 정7품의 전사(典事), 종8품의 급사(給事), 종9품의 섭사(攝事) 각 1원을 두었다. 제학서(諸學署)·융기서(戎器署)·사창서(司倉署)·영작서(營作署)에 각각 감부·관사·섭사 1원씩을 두었으며, 수지국(收支局)에 종7품의 장사(掌事)와 종9품 섭사 각 1원을 두었다. 또 전주국(典酒局)에 급사·섭사 각 1원을 두었으며, 사옥국(司獄局)에 섭사 2원을 두었고, 사부(四部)인 인흥(仁興)·예안(禮安)·의흥(義興)·지안(智安)에 각각 섭사 2원씩을 두었다. 이상은 문관으로 관찰사가 본도 출신 중에 후보자를 추천하였다.

이 밖에 무관 토관직도 설치되었다. 진북위(鎭北衛)에 정5품의 여직(勵直), 종5품의 부여직(副勵直) 각 1원, 정6품의 여과(勵果), 종6품의 부여과(副勵果), 정7품의 여정(勵正), 종7품의 부여정(副勵正) 각 2원, 정8품의 여맹(勵猛), 종8품의 부여맹(副勵猛), 정9품의 여용(勵勇) 각 3원, 종9품의 부여용(副勵勇) 4원을 두었다. 무관 토관직은 절도사가 본도 출신 중에 후보자를 추천하였다. 토관이 경관(京官)으로 임명될 때에는 문반과 무반 모두 1품계를 강등하여 적용하였다. 토관은 퇴관(退官)할 차례가 되었어도 나이 60세가 되어서야 퇴직하였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함흥의 관할 행정구역으로는 관아가 소재한 주남사(州南社)를 위시하여 주동사(州東社), 동명사(東溟社), 퇴조사(退潮社), 보청사(甫靑社), 덕천사(德川社), 덕산사(德山社), 천원사(川原社), 주서사(州西社), 천서사(川西社), 조양사(朝陽社), 하조양사(下朝陽社), 기천사(岐川社), 운전사(雲田社), 삼평사(三平社), 연포사(連浦社), 주지사(朱地社), 선덕사(宣德社), 주북사(州北社), 기곡사(岐谷社), 가평사(加平社), 원평사(元平社), 동원평사(東元平社), 고천사(高遷社), 동고천사(東高遷社), 영천사(永川社), 원천사(元川社)의 27사(社)가 있었다.

변천

함흥의 명칭은 조선시대 내내 변동이 없었지만, 읍호의 변경과 함께 감영의 소재지가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는 변화가 한 차례 있었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났을 때 함흥 사람인 이중화(李仲和) 등이 반란에 가담하고 관찰사 등을 살해했다 하여, 1470년(성종 1) 함흥을 군(郡)으로 강등하고 토관을 없앴다. 그 대신 영흥(永興)을 부(府)로 승격시켜 관찰사의 본영으로 삼고 도(道)의 이름도 영안도(永安道)로 고쳤다(『성종실록』 1년 2월 17일). 1498년(연산군 4)에 다시 함흥부로 감영을 옮기고 함경도의 이름을 회복하였다(『연산군일기』 4년 4월 4일). 1755년(영조 31)에는 관찰사가 부윤을 겸하는 규정이 폐지되었으며, 관찰사와 별도로 판관이 부사(府使)가 되어 행정 업무를 총괄하다가 1757년(영조 33)에 회복되었다. 1895년(고종 32) 대구역주의인 8도제가 소구역주의인 23부제로 바뀌면서 함흥은 부로서 함흥, 정평, 영흥, 고원, 문천, 덕원, 안변, 홍원, 북청, 이원, 단천의 11개 군을 관할하였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이듬해 다시 전국을 13도 8부 1목 331군으로 개편할 때 함흥부는 함경남도에 속하여 관찰사청으로 되었다(『고종실록』 33년 8월 4일).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1910년(순종 3) 10월 1일 공포된 총독부 지방관제에 따라서 함흥부는 군으로 개편되었지만, 계속 도청 소재지로서 함경남도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손정목, 『한국지방제도·자치사연구(상)』, 일지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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