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이완지옥(咸以完之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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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 3월, 우의정민암이 함이완의 고변을 왕에게 알리어 발생한 옥사.

개설

1694년(숙종 20) 3월, 남인계 우의정 민암(閔黯)이 소론계 한중혁(韓重爀)과 노론계 김춘택(金春澤) 등이 은밀히 환국을 도모한다는 함이완(咸以完)의 고변을 왕에게 전달하여 발생한 옥사이다. 이 옥사를 국문하던 중에, 유학 김인(金寅) 등이 남인계가 오히려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상반된 내용의 고변을 올렸다. 숙종이 함이완의 고변을 민암의 협박에 의한 무고로 판단함으로써, 갑술환국의 계기가 되었다.

역사적 배경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정권을 다시 잡은 남인은 견제 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정국을 독단적으로 운영하려는 행태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남인 집권 세력은 서인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주장하며, 왕비 장씨의 오빠인 장희재(張希載)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남인의 동태는 숙종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왕비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도 점점 인현왕후전 소속 나인 출신인 후궁 최씨에게로 옮겨 갔다.

발단

1694년 3월 23일 남인계 우의정 민암이 금위영 군관 최산해(崔山海)의 매부인 함이완의 고변 내용을 왕에게 아뢰었다. 고변은 요지는 소론계인 한중혁과 노론계인 김춘택 등이 금품을 모으고 사람들을 길러 은밀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내용이었다(『숙종실록』 20년 3월 23일). 숙종의 재가를 받은 민암과 남인들은 관련자들을 잡아들여 엄하게 국문하였다. 국문 과정을 통해 한중혁과 김춘택은 각각 따로 환국(換局)을 도모한 것이며, 한중혁은 주로 상인들로부터 김춘택은 주로 역관들로부터 거사 자금을 조달한 것임이 밝혀졌다.

주모자들이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는 상태에서, 3월 29일 유학(幼學) 김인 등은 오히려 남인계가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내용의 고변서(告變書)를 올렸다. 고변의 주된 내용은 총융사장희재가 사람을 매수하여 숙원최씨를 독살하려 한다는 것, 신천군수(信川郡守)윤희(尹憘)와 훈국(訓局) 별장(別將)성호빈(成虎彬) 등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는데 훈국(訓局) 대장(大將)이의징(李義徵)도 참여하였다는 것, 민암·오시복(吳始復)·목창명(睦昌明) 등의 남인이 이 모의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숙종실록』 20년 3월 29일). 국청(鞫廳)을 담당한 남인계 신하들은 김인이 훈국 대장 이의징에 대한 원한으로 무고한 것이라는 보고를 올렸고, 숙종도 이를 수긍하였다.

경과

그러나 숙종은 4월 1일 밤에 갑자기 비망기를 내려 국문을 담당 중이던 집권 남인세력을 모두 축출하고, 기사환국으로 몰락하였던 서인 세력을 중용하는 갑술환국(甲戌換局)을 단행하였다(『숙종실록』 20년 4월 1일). 함이완의 고변은 서인계의 일망타진을 노린 민암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확정되었다. 민암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소론계 남구만(南九萬)의 상소로 이의징과 함께 사사(賜死)되었다. 고변자 함이완과 김인도 옥중에서 여러 차례의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숙종실록』 20년 7월 13일).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당의통략(黨議通略)』
  • 이희환, 「갑술환국과 숙종」, 『전북사학』11·12, 전북대 사학회, 1989.
  • 정경희, 「숙종대 탕평론과 ‘탕평’의 시도」, 『한국사론』30,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93.
  • 정석종, 「조선후기 사회세력의 동향과 정변(政變): 숙종년간의 갑술환국과 중인·상인·무인의 정변 참여를 중심으로」, 『한국사학』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3.
  • 홍순민, 「붕당정치의 동요와 환국의 빈발」신편, 『한국사』30, 국사편찬위원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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