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학(漢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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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학 중 하나인 중국어.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의 역학(譯學)에는 한학(漢學)·몽학(蒙學)·왜학(倭學)·여진학(女眞學)이 있었다. 1393년(태조 2)에 사역원(司譯院)을 설치하고 한학을 익히게 하였다(『태조실록』 2년 9월 19일). 한학은 대중국 외교의 중요성 때문에 역학 중에서 가장 중시되었다. 1482년(성종 13)에는 한어과 출신자를 문과 출신자와 같은 자격으로 서용하는 절목(節目)까지 만들었으나 문신들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하였다(『성종실록』 13년 6월 6일).

역학 행정 및 역학 교육의 중추 기관인 사역원에 정 1명, 부정 1명, 첨정 1명, 판관 2명, 주부 1명, 한학교수 4명, 직장 2명, 봉사 3명, 부봉사 2명, 한학훈도 4명, 몽학·왜학·여진학 훈도 각 2명, 참봉 2명을 두었다. 한학교수 4명 중 2명은 문신이 겸하였다. 그리고 한학습독관(漢學習讀官)을 30명을 두었다. 외국 사신의 영접을 위하여 황주·평양·의주에는 한학훈도를, 제포·부산포에는 왜학훈도를 배치하였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뒤에도 만주인과 한인을 병용하고, 한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면서 기본으로 하였기 때문에 한학이 가장 중요시되었다. 그래서 한학은 계속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우대책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역학생도 235명 중 몽학 10명, 왜학 40명, 여진학[청학] 60명인 데 비하여 한학은 125명(사역원 35명, 평양·의주·황주 각 30명)을 차지하였다. 한학은 사역원과 평양·의주·황주의 역학원에서 교육시켰으며, 한학생도는 지방으로부터 1년에 15명씩 세공(歲貢)을 받았다.

역과초시 정원을 전공별로 보면 사역원시(司譯院試)에서 한학이 23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몽학·왜학·여진학은 각 4명이었다. 한학의 경우에만 향시(鄕試)가 실시되었다. 한학향시는 황해도 7명, 평안도 15명이었다. 한학은 역과 내에서 비중이 월등히 커서 초시 선발 인원 57명 중 45명이 한학이었다. 그리고 최종 시험인 복시의 합격자 정원 19명 중 몽학·왜학·여진학 전공자는 2명인 데 비하여 한학은 13명을 차지하였다. 역과 시험에서는 한학 전공자를 장원(壯元)으로 삼았다.

한학의 경우에만 강서(講書)하는 시험이 있었다. 『대학』·『논어』·『맹자』·『중용』 등 사서(四書)는 임문고강(臨文考講)하게 하고, 『노걸대』·『박통사』·『직해소학』은 배송(背誦)하였다. 『속대전』에서 중국어 학습서인 『오륜전비(五倫全備)』를 추가하고 『직해소학』은 폐지하였다. 『대전통편』에서는 우리말로 풀이한 중국어 단어 책 『역어유해(譯語類解)』를 추가하고 『오륜전비』는 폐지하였다. 몽학·왜학·여진학 같은 사자(寫字) 시험은 없었다. 한어도 한자로 표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역어 시험으로 『경국대전』을 번역하였다.

변천

한학은 역과 내에서 비중이 월등히 커서 선발 인원이나 경쟁률이 다른 어학에 비하여 높았다. 중국에 대한 외교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한학은 역과 내에서 가장 중요시되었다. 명나라 멸망 후 청나라가 들어선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조선후기 서양 천문학과 시헌력(時憲曆)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대전통편』에서는 잡과의 첫째 자리가 역과에서 음양과로 바뀌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역과방목(譯科榜目)』
  • 『통문관지(通文館志)』
  • 강신항, 『한국의 역학』,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 송기중, 「『경국대전』에 보이는 역학서서명에 대하여」, 『국어학』 14, 1985.
  • 원영환, 「조선시대의 사역원제도」, 『남계조좌호박사 화갑기념논총』, 1977.
  • 이남희, 「조선후기 잡과교육의 변화와 특성」,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13-1, 2014.
  • 이성무, 「조선초기의 기술관과 그 지위」, 『혜암유홍열박사 화갑기념논총』,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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