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조약(漢城條約)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사후 처리 및 보상을 위하여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한 조약.

개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를 위하여 조선과 일본이 맺은 조약이다. 조선 정부는 김옥균과 개화파가 일본의 영향으로 정변을 일으켰으니 일본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오히려 일본은 정변으로 죽은 일본인과 파괴된 공사관의 복구를 요구하였다. 결국 조선 정부는 일본 정부에 정변에 사과를 하였고 죽은 일본인과 각종 피해를 보상하는 것으로 회담을 마쳤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884년 12월에 박영효·김옥균·홍영식·서광범·서재필 등의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켜 민씨 세력을 축출하고 개혁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민씨 정권이 불러들인 청나라 군대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당시 한양의 백성들은 일본공사관을 불태우고 공사관의 서기관들과 일본 거류민을 죽였다. 그해 말에 일본은 전권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에게 2개 대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한성부로 진주하게 하였다. 이후 그는 직접 고종을 알현하고 손해배상을 요구하였고, 고종은 좌의정 김홍집(金弘集)을 전권대신(全權大臣)으로 하여금 협상에 응하게 하였다.

내용

한성조약은 5개의 조문과 별단으로 구성되었다. 조약문의 제1조는 조선국이 일본에 국서(國書)를 보내어 사의를 표명한다는 것이다. 제2조는 일본국 인민의 유가족과 부상자를 구제하며, 상인들의 화물을 훼손·약탈한 것을 보상하기 위하여 조선국에서 110,000원(圓)을 지불한다는 것이다. 제3조는 기림(磯林) 대위를 살해한 흉악한 무리를 조사 및 체포하여 종중정형(從重正刑)한다는 것이다. 제4조는 일본 공관(公館)을 새로운 자리로 옮겨서 지으려고 하는데, 조선국에서는 택지와 건물을 공관 및 영사관(領事館)으로 넉넉히 쓸 수 있게 주어야 하며, 그것을 수리하고 중축하는 데에 다시 조선국에서 20,000원을 지불하여 공사 비용으로 충당하게 한다는 것이다. 제5조는 일본 호위병의 병영은 공관 부근에 택하여 정하고 임오속약(壬午續約) 제5관에 의하여 시행한다는 것이다. 별단(另單)은 2개 조항으로 제1은 약관 제2조와 제4조의 금액은 일본 은화로 환산하여 3개월 내에 인천에서 지불을 끝낸다는 것이며, 제2는 제3조의 흉악한 무리에 대한 처리는 조약을 체결한 후 20일을 기한으로 한다는 것이다(『고종실록』 21년 11월 24일).

변천

1885년(고종 22) 2월 조선 정부는 사죄 사절로 전권대사 서상우(徐相雨), 부전권대사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일본에서 서상우는 김옥균, 박영효 등의 송환을 요구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1967.
  • 러시아대장성, 김병린 역, 『구한말의 사회와 경제: 열강과의 조약』, 유풍, 1983.
  • 운노 후쿠쥬, 정재정 역, 『한국 병합사 연구』, 논형, 2008.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 임경석·김영수·이항준 공편, 『한국 근대 외교사전』,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12.
  • 이민원, 「대한제국의 성립과정과 열강과의 관계」, 『한국사연구』 64, 198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