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은행(漢城銀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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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월 8일 설립된 일반은행으로, 현존하는 신한은행의 전신.

개설

한성은행은 1897년(고종 34) 1월 8일 설립인가를 받고 2월 19일 첫 영업을 개시했다. 1903년에는 한국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대립 속에서 공립 한성은행으로 개편되었다. 1905년에는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의 화폐정리사업을 계기로 주식회사로 개편되었다. 1911년에 조선 귀족들의 이른바 ‘은상공채(恩賜公債)’를 이용하여 30만 원에서 300만 원으로 증자했다. 1918년에는 도쿄[東京]에 법인기업 중 한국 최초로 해외지점을 두었고, 1922년에는 오사카[大阪]에 지점을 설치했다. 1923년 9월에 발생한 관동대지진으로 도쿄지점이 대타격을 받자 한성은행의 영업은 악화되기 시작했고, 1925년 말부터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한성은행 정리가 시작되었다. 1927년 발생한 금융공황은 정리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총독부의 직접 정리가 이루어졌다. 이때의 정리 과정에서 조선식산은행이 이왕가 및 조선 귀족의 소유 주식을 인수하여 최대주주가 되었다. 형식적으로라도 한국인이 경영하던 은행이 일본 특수은행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1943년에는 동일은행과 합병하여 조흥은행으로 새롭게 발족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설립인가일 기준으로 한국 최초의 일반은행인 한성은행은 1897년 1월 8일에는 탁지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고 2월 19일 첫 영업을 개시했다. 1897년 1월에 작성된 한성은행규칙(漢城銀行規則)은 현존하는 회사정관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동->이 규칙에 의하면, 한성은행은 일반은행 업무 외에 특별은행의 성격을 갖고 있다. 자본금 규정에 정부의 자본금 출자를 규정하고, 영업 범위에 정부 발행의 공채(公債)·은표(銀票)·환표(換票)의 대여 또는 매입 업무, 화폐 교환 및 태환 업무 등의 중앙은행 관련 금융업무의 취급을 규정하고 있다. 특히 사립 보통은행임에도 불구하고 태환은행권 발행의 특권도 수임받고 있었다.

한편, 한성은행은 창립 첫해에 주식배당을 실시하면서 1898년 1월 18일에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추심할 것을 『독립신문』에 광고하였다. 다음 해인 1899년에도 계속해서 주주배당을 실시하고, 2월 7일 『독립신문』을 통해 배당금을 찾아갈 것을 광고하였다. 정상적으로 영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상적인 영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1903년 공립 한성은행의 성립과 맞물려 한국 은행사에 있어 중요한 지점이 아닐 수 없다.

1903년 공립 한성은행의 등장에는 두 가지 정치경제적 배경이 있었다. 하나는 한국을 둘러싸고 전개된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차관공여전(借款供與戰)이었다. 러시아가 먼저 러청은행을 통해 500만 원 차관 공여를 제시하면서 함경도 단천금광 외 4개소의 채굴 특허권과 탁지부 및 궁내부의 공급 취급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궁내부 러시아어 통역 김도일을 통해 일본 공사관 부무관 노즈 시즈다케[野津鎭武] 소좌의 밀정을 통해 일본에 흘러들어 갔고, 일본 정부는 제일은행의 시부사와와 상의하여 한국인이 경영하는 은행을 내세워 러시아의 차관 공여 제안을 물리치고자 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1902년부터 시작된 일본 제일은행권의 한국 내 강제통용 문제였다. 이용익을 중심으로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차관을 도입하여 자주적인 화폐제도를 확립하고자 했던 대한제국의 노력이 일본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이를 대신하여 일본은 일본의 제일은행의 일람불수형(一覽拂手形), 즉 제일은행권을 한국에 통용시키려 했지만, 한국인들의 저항으로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이에 일본은 역시 한국인이 경영하는 은행을 통해 제일은행권을 유통시켜 저항감을 완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변천

이후 한성은행의 경영은 거의 전적으로 일본 제일은행의 자금에 의존했다. 영업자금을 공급하면서 제일은행은 한성은행을 철저한 감독하에 두었다. 이때 형성된 두 은행 사이의 관계는 식민지기에 들어선 뒤에도 계속되었고, 뒤에 한성은행장이 되는 한상룡과 제일은행장 시부사와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였다.

1905년 9월 23일 한성은행은 주식회사로 조직을 개편하였는데, 같은 해 12월 31일을 기준으로 개편 이후 처음으로 제1기 영업결산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당기순이익이 4,547원 74전이었으며, 주주배당은 연 2할을 실시하였다. 제1기 영업 내용을 1906년 2월 28일 『황성신문』을 통해 광고하였다. 이와 같은 한성은행의 영업 내용 공시는 우리나라 기업사상 효시로서 그 의의가 크다. 1906년 5월 말 당시 국내 송금 가능 지역이 인천, 군산, 부산, 마산, 대구, 개성, 평양, 진남포, 원산, 함흥, 성진 등으로 확대되었으며, 1906년 하반기에는 수원지점을 설치했다. 한성은행은 1906년부터 국내 각 지역 및 일본의 주요도시에 소재하는 은행과 환거래계약을 체결하고, 송금 업무를 확대해나갔다.

1903년 한성은행은 서양식 부기를 채택했다. 한상룡이 제일은행의 경성 총지점에 내왕하여 은행 운영의 방법과 서양부기를 배워서 그것을 실무에 채택하였고, 일본인 고문까지 채용하였다. 그러나 당시 은행장 이재완과 부행장 김종한은 신식의 서양부기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별도로 한문으로 재래식 장부를 작성하여 결재를 받았다. 이것이 이제까지 알려진 바로는 서양부기가 우리나라에 채용된 최초의 일이다. 더욱이 1906년 3월 21일 칙령 제12호로서 은행 조례가 발포되고, 6개월마다 영업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하고, 대차대조표를 신문에 공고하도록 하였다.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일본인들이 서양부기의 채용을 강요한 것이다.

1910년 9월에 한상룡은 한성은행 전무에 취임했다. 취임 이후 한상룡은 한성은행의 자본금을 30만 원에서 300만 원으로 10배 증자를 시도했다. 이때 한상룡은 병합 당시 ‘조선 귀족’들이 받은 ‘은사공채(恩賜公債)’를 활용했다. 처음에는 한상룡의 의견에 부정적이었던 총독부는 조선총독부령 제2호 ‘한성은행의 자본증가 및 업무감독에 관한 건’(1911. 1. 15.)을 공포하여 이를 지원했다. 조선 귀족이 소유한 은사공채를 액면 그대로 투자할 수 있도록 인정해준 것이다. 이후 한성은행이 귀족은행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이유였다. 이때 구황실(이왕가) 또한 주식을 인수했다. 이후에도 주식 인수를 계속했다. 1915년 5월 13일에는 이왕직 회계과에서 한성은행 주식 2,733주를 주당 21원에 구입하고, 또 보식원(普植園)에서 출자한 500주를 추가로 인수하여, 두 건 합계 7만 2,393원을 기본 재산에 편입시켰다(『순종실록부록』 8년 5월 13일). 이왕직은 1918년 6월 당시 4,766주를 소유하여 이재완(李載完), 이준공(李俊公), 이강공(李堈公)에 이어 제4위의 대주주로 있었지만, 1919년 6월에는 6,955주를 소유하여 최대주주로 올라섰고, 이후 꾸준히 소유 주식을 늘려 1920년 6월에는 총 12만 주 중 2만 3,232주를 소유하였다. 이 소유주수와 최대주주로서의 지위는 1928년 한성은행의 정리가 단행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여기서 나오는 배당금 수입은 구황실재정의 주요한 수입원 중 하나였다.

1918년 4월 6일 데라우치[寺內] 총독은 전무 한상룡을 불러 한성은행의 도쿄지점 설치를 요청했다. 1918년 4월 17일에 ‘내외지공통법’이 공포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조선이 아닌 조선에서 일본으로 진출하는 은행회사의 모범 사례가 필요했던 것이다. 한상룡은 1917년에도 총독부의 탁지부 장관으로부터 간도지점 설치를 요구받았지만 이 요구를 거절했었다. 하지만 데라우치 총독의 도쿄지점 설치 제안은 받아들였다. 1918년은 한창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의 호황을 누리고 있었을 때였고, 일본 내에는 유휴자금이 넘쳐나고 있었다. 또한 한성은행 고객 중에는 도쿄와 거래관계를 갖고 있는 이들도 다수 있었다. 즉, 일본 내 유휴자금의 흡수와 도쿄와의 거래관계를 고려하여 도쿄지점 설치 제안을 수락한 것이다. 1918년 12월에 설치된 도쿄지점은 한성은행의 총예금액의 27.2~36.1%를 차지했고, 총대출액에서는 14.7%~19.5%의 비중을 점할 만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1922년에는 오사카지점을 설치했다.

데라우치의 ‘선만일체화(鮮滿一體化)’ 정책에서 비롯된 한성은행의 도쿄 및 오사카 두 지점의 설치는, 결과적으로 외부 충격에 대한 한성은행의 내구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 경제에 급격한 변화가 발생할 경우 도쿄와 오사카 두 지점이 일본과 조선을 연결하는 파이프가 되어 한성은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우려는 현실화했다. 1923년 9월의 관동대지진이 발생하면서 한성은행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두 지점에 불량채권이 대량으로 발생한 것이다. 특히 도쿄지점의 예금과 대부금 비중이 한성은행 전체의 28.8%와 13.5%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진으로 인한 타격은 매우 컸다. 지진의 영향은 1920년대에 증가하고 있던 대출의 고정화와 맞물리면서 한성은행의 영업을 더욱 악화시켰다.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1925년 말부터 한성은행에 대한 정리가 시작되었다.

한성은행에 대한 정리는 조선은행과 조선식산은행이 담당했다. 1926년 2월에는 전무 취체역으로 조선은행 부산지점장 츠츠미 에이이치[堤永市]를 영입하였다. 츠츠미의 역할은 한성은행의 영업 악화에 제동을 걸고 경영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츠츠미는 ‘경비 절약 및 능률 증진을 위해 행원의 정리를 단행’하는 등 다양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1927년 3월에 발생한 금융공황은 이러한 경영정상화 노력을 어렵게 만들었다. 조선의 전 은행도 4월 22일과 23일의 이틀간 모라토리엄을 실시하여 임시휴업에 돌입했다. 일본은행의 특별융자에도 불구하고 한성은행의 영업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가 직접 한성은행 정리에 나섰다.

총독부와 대장성은 한성은행을 유력 은행에 합병시키고자 했고, 일본은행은 ‘조선식산은행으로 하여금 실제 경영을 맡도록 할 것’을 주장했다. 최종적으로 한성은행의 정리에 동원된 자금은 1,095만 원에 달했다. 결국 일본은행의 정리안이 채택되었고, ‘이왕가 및 귀족 주주에 대해서는 적당한 방법으로 이번에 주주로부터 이탈시킬 것’이 정해졌다. 반감된 자본금과 총독부 대하금의 일부를 가지고 이왕직과 조선 귀족이 소유하고 있던 주식을 매수한 것이다. 식산은행은 한성은행의 정리 과정에서 주식 2만 8,094주를 소유하여 최대주주가 되었다. 그와 관련하여 ‘한은은 데라우치 총독 시대에 왕공가(王公家) 소유 공채를 한은주(漢銀株)로 바꾼 역사 있는 은행으로, 이 왕공가의 지주(持株)를 식은(殖銀)이 견체(肩替)하였다. 현재는 식은에서 두취를 영입하여 갑종은행(甲種銀行) 식은이 거의 일심동체와 같은 경영을 하고 있다. 이 또한 파란이 있었는데, 을종은행(乙種銀行) 한은은 착착 친은행(親銀行)인 갑종은행 식은에 접근하고자 하고 있다’라는 기술로부터 한성은행과 식산은행의 관계를 알 수 있다.

현존 최고(最古) 일반은행인 한성은행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식산은행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한성은행은 일제의 은행합동정책으로 1943년 7월 동일은행과 합병하여 10월 1일부터 조흥은행으로 새롭게 발족하였다. 이로써 한국에는 조흥은행과 조선상업은행 두 개의 일반은행만 남게 되었다. 일제는 이상의 일반은행 통폐합과 더불어 일반은행 지점의 강제 교환과 재배치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해방 당시 조선상업은행과 조흥은행의 지점은 지역적으로 상당한 편차를 보였다. 조선상업은행 지점은 북한 전역과 남한의 경남 지방에 편재하였고, 조흥은행 지점은 남한 전역에 편중된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이유로 해방 직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조흥은행의 업세는 조선상업은행을 단연 압도할 수 있었다. 해방 후 국가 건설 과정에서 조흥은행이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과 더불어 중앙은행 자리를 다툴 수 있었던 배경은 여기에도 있었다.

참고문헌

  • 윤석범 외, 『한국 근대금융사 연구』, 제1편·제2편, 세경사, 1996.
  • 조흥은행백년사 편찬반 편, 『조흥은행 백년사』제1편, 주식회사 조흥은행, 1997.
  • 김명수, 「1920년대 한성은행의 정리와 조선인 CEO 한상용의 몰락」, 『역사문제연구』제27호, 역사문제연구소, 2012.
  • 김명수, 「대한제국기 일본의 금융장악 기도와 일본 제일은행 -1903년 공립한성은행의 성립과 관련하여-」, 『일본문화연구』제47집, 동아시아일본학회, 2013.
  • 金明洙, 『近代日本の朝鮮支配と朝鮮人企業家·朝鮮財界 -韓相龍と朝鮮實業倶楽部を中心に-』, 慶應義塾大學經濟學硏究科博士論文,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