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무아문(學務衙門)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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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학무아문 |
한글표제 | 학무아문 |
한자표제 | 學務衙門 |
하위어 | 총무국(總務局), 성균관(成均館), 학교(學校), 서원(書院) 사무국(事務局), 전문학무국(專門學務局), 보통학무국(普通學務局), 편집국(編輯局), 회계국(會計局), 관상국(觀象局), 갑오개혁(甲午改革) |
관련어 | 학부(學部), 관상감(觀象監), 육영공원(育英公院), 사역원(司譯院)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고종 |
집필자 | 왕현종 |
폐지 시기 | 1895년(고종 32)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학무아문(學務衙門) |
1894년 1차 갑오개혁 때 국내 교육과 학무(學務) 등에 관한 행정을 맡아보던 중앙 행정 부서.
개설
1894년 6월 의정부 8아문 개혁 때 설립된 학무아문은 국내 교육과 학무에 관한 모든 행정을 담당하였다. 그 산하에는 총무국, 성균관과 학교, 서원 사무국, 전문학무국(專門學務局), 보통학무국(普通學務局), 편집국, 회계국 등을 두었다. 이전의 관상감(觀象監), 육영공원(育英公院), 사역원(司譯院) 등의 관청도 학무아문에 포함되었다. 대개 초등 교육 기관으로서의 소학교 설치와 운영 등에 관한 업무를 담당했다. 1895년 4월 학부로 개편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94년 6월 갑오개혁 초기 개혁을 주도한 군국기무처는 조선 왕조 국가의 권력 구조를 변경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의정부와 궁내부를 분리하고 국가와 왕실의 권한을 구분하였다. 또 이전의 내무부와 육조(六曹), 기타 지나치게 많이 설치된 기구를 통폐합하기로 하였다. 의정부와 8개 아문을 창설하면서 설립된 학무아문은 국내의 교육과 학무 등을 관장하는 새로운 부서였다. 교육과 학술을 담당하는 기구로 전문학무국·보통학무국 등을 두고, 소학교와 사범학교로 나누어 관장하였다. 갑오개혁은 초등 교육 기관인 소학교부터 중학교, 대학교, 전문학교 등에 이르는 일관적인 연계성을 지닌 교육 체계를 지향하고 있었다.
조직 및 역할
학무아문에는 대신 1명, 협판 1명, 참의(參議) 6명, 주사(主事) 18명이 있었다. 총무국에서는 미처 설치하지 못한 각 국(局)의 서무를 맡아보았다. 총무국에는 참의 1명, 주사 2명이 있었으며 주사는 비서관을 겸임하였다. 성균관과 학교, 서원 사무국에서는 옛날의 성인들과 선현들의 사당과 서적을 보관하는 등의 사무를 맡아보았다. 직원으로는 참의 1명, 주사 2명이 있었다. 전문학무국에서는 중학교, 대학교, 기예학교, 외국어학교, 전문학교를 맡아보았으며, 직원으로 참의 1명, 주사 4명이 있었다. 보통학무국에서는 소학교, 사범학교를 맡아보았으며, 직원으로 참의 1명, 주사 4명이 있었다. 편집국에서는 국문 철자, 외국문 번역과 교과서 편집 등의 일을 맡아보았으며, 직원으로 참의 1명, 주사 4명이 있었다. 회계국에서는 학무아문에서 출납하는 재정 문서를 맡아보았으며, 직원으로 참의 1명, 주사 2명이 있었다.
1894년 7월 11일에는 각 부(府), 각 아문의 사무는 여러 국을 나누어 설치하였더라도 당분간 일이 복잡하지 않은 곳에서는 당해 아문의 여러 국에 나아가 임시로 품계에 따라 겸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관상감은 관상국(觀象局)으로 고쳐 학무아문에 소속시키고 참의 1명, 주사 6명을 두었다. 성균관 참의는 종전대로 대사성(大司成)이라고 부르고 주사는 전적(典籍)이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1894년 7월 18일에는 이전의 각종 기관을 새로 개편된 각 아문 소속 관청으로 재배치하였다. 학무아문에는 관상감, 육영공원, 사역원 등이 배치되었다. 7월 28일에는 학무아문 관제를 개정 증보하여 참의 6명은 7명으로 고치고, 주사 18명은 22명으로 고쳤다. 성균관 지사(知事)는 1명이었으며, 참의는 대사성을 겸하고, 주사는 전적을 겸하도록 하였다.
관상국에서는 천문(天文), 역수(曆數), 기상 관측 등의 사무를 맡았으며, 참의가 1명, 주사가 6명이었다.
갑오개혁에서 추구하는 전반적인 교육의 목표는 인민에 대한 보편 교육이었다. 교육 개혁의 주 대상은 초등 교육 기관으로서 소학교였다. 군국기무처는 1894년 7월 28일 소학교 교과서의 편찬이 시급하다는 것을 의결하였다. 8월 28일에는 군무아문에서 국문(國文)으로 군졸(軍卒)을 위한 교과서를 편찬해서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교과서를 국문으로 편찬하여, 이전의 소수 양반 지배 계급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보편적인 대중 교육의 확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1894년 7월 13일에는 나이가 어리고 총명한 자제를 선발하여 외국의 각 학교에 파송하고, 학업을 쌓은 뒤에는 관리 임용에 대비케 한다고 결정했다. 이는 일단 개혁 사업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고육책이기는 했지만, 국내의 중학교 이상 고등 교육을 실시하려던 체계적인 교육 기관의 설립 방침은 크게 후퇴하였다.
변천
1895년 4월 1일부로 칙령 46호 학부 관제를 실시하게 되어 학무아문은 학부로 개편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 『속음청사(續陰晴史)』
- 『관보(官報)』
- 『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
- 국사편찬위원회,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1~40, 국사편찬위원회, 1986~1994.
- 송병기·박용옥·박한설 편저, 『한말근대법령자료집』1~4, 국회도서관, 1970~197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