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천부(豊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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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서북부에 있으며 동쪽으로 은율, 남쪽으로 송화·장연, 서쪽과 북쪽으로 서해에 접하는 곳에 설치되어 주민들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풍천부(豊川府)는 황해도 서북 해안가에 위치한 해안 방어의 요충지였으므로 도호부사가 병마첨사를 겸하였다. 풍천량에는 허사진(許沙鎭)이 있었고 만호(萬戶)가 설치되었다. 조선후기에는 허사진을 첨사진으로 바꾸었고 초도에도 첨사진을 두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구을현(九乙縣)이었다. 고려시대에 풍주(豐州)가 되었고, 995년(고려 성종 14)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1018년(고려 현종 9)에 방어사로 변경되었다. 황해도 서북 해안가에 위치하여 왜구의 침범이 잦았으므로 조선 건국 후 1397년(태조 6)에 진을 설치하고 병마사가 지주사(知州事)를 겸하도록 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풍천군으로 고쳤다. 1414년(태종 14)에 은율현을 병합하여 풍률군(豊栗郡)이 되었다가, 1415년(태종 15)에 은율현을 회복시키고 다시 풍천군이 되었다. 1423년(세종 5)에 병마사 대신 첨절제사를 두었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3품 도호부사가 보임되었고, 경내의 풍천량 허사포에 만호가 설치되었다. 좌수 1명, 별감 3명이 있었다. 세종 때에는 영진군 67명, 선군 40명, 봉화군 7명이 있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해방(海防)이 중시된 조선후기에는 진영군관 50명, 토포군관 30명, 아전 34명, 지인 15명, 사령 27명, 관노 13명, 관비 17명이 있었다.

변천

조선후기에 해방을 강화하면서 도호부사가 좌영장토포사를 겸하게 하였다. 풍천량에 있던 허사포진을 비파곶(比巴串)으로 옮겨 허사진이라 하고 첨사를 두었고, 1702년(숙종 28)에는 초도진(椒島鎭)을 신설하여 해안 방어를 강화하였다(『숙종실록』 28년 윤6월 20일).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재편하면서 해주부 풍천군으로 바뀌었으며, 이듬해에 13도제가 시행되자 황해도 풍천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황해도(黃海道) 풍천도호부(豐川都護府)
  • 『여지도서(輿地圖書)』황해도(黃海道) 풍천(豐川)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강석화,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 방위체계」, 『한국문화』38,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