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신수뢰(豊臣秀賴)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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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풍신수뢰 |
한글표제 | 풍신수뢰 |
한자표제 | 豊臣秀賴 |
동의어 | 평수뢰(平秀賴), 수뢰(秀賴) |
관련어 | 덕천가강(德川家康), 수뢰군(秀賴君), 풍신수길(豊臣秀吉) |
분야 | 정치/군사·국방/전쟁 |
유형 | 인물 |
지역 | 일본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윤성익 |
이칭(자,호,봉작호,시호) | 아명: 습환(拾丸), 등길랑(藤吉郞) |
성별 | 남 |
생년/일 | 1593년 8월 29일 |
몰년/일 | 1615년 6월 4일 |
출신지 | 일본 |
관력 | 종삼위좌근위권중장(從三位左近衛權中將), 종이위권중납언(從二位權中納言), 권대납언(權大納言), 정이위(正二位), 내대신(内大臣), 우대신(右大臣) |
가족관계(부,조,외조[모], 장인[처], 형제) | 부: 풍신수길(豊臣秀吉), 모: 정전(淀殿), 처: 덕천수충(徳川秀忠)의 딸 천희(千姫)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풍신수뢰(豊臣秀賴)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39년 1월 23일, 『광해군일기』 9년 5월 30일, 『선조실록』 33년 4월 14일, 『선조실록』 34년 4월 15일 |
일본 안토·도산(安土·桃山) 시대의 무장으로 풍신수길의 계승자.
개설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차남으로 풍신수길이 57세 때인 1593년 대판성(大坂城)에서 탄생했다. 모친은 풍신수길의 측실인 정전(淀殿)이며, 아명은 습환(拾丸)이다. 수뢰가 탄생하기 전 풍신수길에게는 친아들이 없어 수뢰의 종형에 해당하는 풍신수차(豊臣秀次)가 수길의 양아들로서 관백(關白)을 물려받고 그 후계자가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수뢰 탄생 후 수길은 친아들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 1595년 수차의 관백 직위를 박탈하고 결국 자살에 이르게 했다. 이후 수길의 확실한 후계자로서 수뢰의 지위가 확정되었다. 수길은 수뢰의 장래를 위해 부하 무장들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수뢰에의 충성을 맹세케 하고 유력 영주들을 보좌역으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1596년 3세 때 조정으로부터 종오위하의 관직을 받고 이후 수뢰(秀賴)로 개명하였다. 1597년 다시 종사위하의 관직을 받은 후 계속 승진하여, 1598년 4월 6세의 나이로 종2위권중납언(宗二位權中納言)이 되었다. 이해 수길의 병이 깊어져 중태에 빠지자 임종 전 수길은 재차 영주들에게 수뢰에의 충성을 맹세케 하고 결국 8월 사망했다. 수길의 사망 뒤 수뢰가 가독(家督)을 계승하고 대판성(大坂城)에 거점을 두었다. 그러나 곧 유력 영주들 사이의 주도권 싸움이 격화되어 1600년 관원[關ヶ原] 전투가 발발, 이 전투에서 덕천가강(德川家康)의 동군이 승리한 후 실질적인 권력은 덕천가강에게 넘어가고 수뢰의 풍신씨는 대판성을 중심으로 한 일개 영주로 전락했다. 수뢰는 1603년 내대신(內大臣), 1604년에는 우대신(右大臣)으로 관직은 올랐으나 이는 명분에 불과했고 일본 정치의 중심은 1603년 정이대장군에 올라 강호(江戶)에 막부(幕府)를 설립한 덕천수충(德川秀忠, [도쿠가와 히데타다])으로 옮겨갔다.
1614년 11월 덕천수충은 대판성을 공격하여, 일시 휴전한 뒤 1615년 5월 재차 공격해 성을 함락했다. 대판성의 함락과 함께 수뢰는 자살하고 그 아들도 후에 살해당해 풍신씨는 결국 멸망했다.
활동 사항
풍신수길은 조선과의 통교에서 평수길(平秀吉)의 명의를 사용했다. 그 아들인 수뢰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평수뢰(平秀賴)(『선조실록』 39년 1월 23일) (『광해군일기』 9년 5월 30일)로 나타나며, 보통은 성을 생략한 채 ‘수뢰’로만 적고 있다. 한편, 임진왜란 종전 후 일본에서 조선으로 파견된 강화사절은 ‘수뢰군(秀賴君)’이라는 존칭을 사용하며 수뢰가 일본의 최고권력자임을 나타내고 있지만, 강화사절의 파견이 실질적으로는 덕천가강에 의한 것임도 드러난다(『선조실록』 33년 4월 14일).
임진왜란 직후이기도 해서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일본의 내정에 관심이 많아 관원 전투(『선조실록』 34년 4월 15일)나 대판성 전투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한 정보를 전하고 있다. 특히 관원 전투 이후 일본의 지배권이 풍신수뢰와 덕천가강 어느 쪽에 있는지 조선 조정에서 진상 파악을 위해 여러 차례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대한 조선의 경계심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笠谷和比古, 『關ヶ原合戰と大坂の陣』(戰争の日本史16), 吉川弘文館, 2007.
- 福田千鶴, 『豊臣秀賴』(歷史文化ライブラリー), 吉川弘文館, 2014.
- 戰國人名辭典編集委員會, 『戰國人名辭典』, 吉川弘文館, 2005.
- 민덕기, 「조선후기 조·일강화와 조·명관계」, 『국사관논총』12, 국사편찬위원회, 199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