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충사(表忠寺)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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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표충사 |
한글표제 | 표충사 |
한자표제 | 表忠寺 |
동의어 | 영정사(靈井寺), 죽림사(竹林寺) |
관련어 | 기허당영규(騎虛堂靈圭), 사명유정(四溟惟政), 사명제전(四溟祭典), 서산휴정(西山休靜), 재약산(載藥山), 표충사(表忠祠), 표충서원(表忠書院), 혜린국사(惠燐國師)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신라~현대 |
집필자 | 윤기엽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표충사(表忠寺) |
사명 대사 유정의 사당이 있는, 경상남도 밀양의 사찰.
개설
표충사(表忠寺)는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재약산(載藥山)에 있는 절이다. 신라 때 원효가 창건한 죽림사(竹林寺)에 연원을 두고 있고, 흥덕왕 때 영정사(靈井寺)라 하였다. 조선시대 헌종 때 사명 대사의 사당인 영축산 표충사(表忠祠)가 재약산 영정사로 옮겨오면서 절 이름을 표충사(表忠寺)라 하였다. 현재 표충사에서는 유림회와 불교계가 함께 사명제전(四溟祭典)을 봉행한다.
연원
표충사는 654년(신라 태종무열왕 1) 원효가 창건하여 죽림사(竹林寺)라 하였다고 한다. 829년(신라 흥덕왕 4) 인도의 승려 황면(黃面) 선사(禪師)가 황록산 남쪽에 3층석탑을 세워 절을 중창하고 산 이름을 재약산(載藥山), 절 이름을 영정사(靈井寺)로 고쳤는데, 당시 3층석탑에는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신라말 진성여왕 때 선수행(禪修行)의 사찰이 되었다.
변천
(1) 고려시대
고려중기 문종 때 혜린(惠燐) 국사(國師)가 머물렀다. 원(元) 간섭기인 1286년(고려 충렬왕 12)에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인 일연(一然)이 1,000여 명의 승려를 모아 불법을 크게 떨치자 나라에서 ‘동방제일선찰(東方第一禪刹)’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고 전한다.
(2) 조선시대
조선 인조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으면서 폐허가 되었던 절을 1715년(숙종 41) 밀양군수김창석의 발원으로 서산휴정(西山休靜), 사명유정(四溟惟政), 기허영규(騎虛靈圭)의 영정을 함께 모시고 중창하였다. 1738년(영조 14) 남붕, 연초가 왕명으로 절을 크게 중수했다. 1742년(영조 18) 사명 대사의 비석인 송운대사영당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이때 절을 크게 정비했다고 하여 중흥사(重興寺)로 불리기도 했다.
1839년(헌종 3) 사명 대사의 법손(法孫)인 월파당천유(天有)가 부사심의복(沈宜復)의 도움으로 사명 대사의 충혼을 기리고자, 사명 대사의 고향인 밀양시 무안면의 영축산 백하암(白霞巖)에 세워져 있던 사당 표충사(表忠祠)를 이곳 밀양시 단장면의 재약산 영정사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영정사는 이미 폐사가 된 상태여서 여기에 사원의 배치를 옛날 체제대로 복원하였다. 이때 헌종이 표충사(表忠寺)를 사액(賜額)하여 절 이름이 영정사에서 표충사로 바뀌게 되었다.
1860년(철종 11) 월암(月庵) 선사(禪師)가 만일기도를 회양하면서 만일루(서래각)를 세웠다.
(3) 근현대
일제시대인 1926년에 응진전(應眞殿)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효봉(曉峰) 선사가 말년에 주석하며 1963년에 입적하기도 했다.
표충사의 경내에 있는 표충서원(表忠書院)에서는 매년 봄·가을에 향사를 거행한다. 2005년 9월부터 봄·가을에 봉행된 향사가 전국 규모의 제전인 사명제전(四溟祭典)으로 승격되었다. 사명제전은 전국 규모의 문화 축제로 3일간 진행되고, 불교계와 유림회가 공동으로 추계향사를 봉행한다.
현재 표충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문화재
표충서원(表忠書院,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운 휴정(休靜)·유정(惟政)·기허(騎虛) 3대사의 충렬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한 사당이다. 선조가 표충서원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서원 내에는 3대사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폐지되었다가 그 후 복원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불교 사찰 내의 유교식 서원이라는 특징이 있다.
청동함은향완(靑銅含銀香垸, 국보 제75호)은 1177년(고려 명종 7)에 조성된 것으로 국내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향완이다. 높이 27.5㎝ 지름 26.1㎝의 크기로 청동에 홈을 파고 은입사 방법에 의해 문양을 새겼다. 안쪽 면에 57자의 은입사된 명문을 통해 1177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고, 또 받침 안쪽 면에 ‘창녕북면용흥사(昌寧北面龍興寺)’가 점각(點刻)되어 있어서 창녕 용흥사에 있던 향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표충사 3층석탑(보물 제467호)은 통일신라 때 조성된 탑으로 높이 7.7m에 이른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석탑으로 알려져 있다. 대광전(大光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의 팔작집으로 조선후기에 건축되었다.
이밖에 표충사 석등(石燈,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 표충사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 표충사 영정 및 탱화(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8호), 사명 대사의 유품 300여 점이 보존되어 있다.
참고문헌
- 『가람고(伽藍考)』
- 「표충사사적비(表忠祠事蹟碑)」
- 조선총독부 편, 『조선사찰사료』, 조선총독부, 1919.
- 김동화·김영태·목정배, 「호국대성 사명대사연구」, 『불교학보』8,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