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조흥(平朝興)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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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평조흥 |
한글표제 | 평조흥 |
한자표제 | 平朝興 |
동의어 | 유천조흥(柳川調興) |
관련어 | 국서개작사건(國書改作事件), 대마도(對馬島), 평의성(平義成),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 |
분야 | 정치/외교/사행 |
유형 | 인물 |
지역 | 일본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허지은 |
이칭(자,호,봉작호,시호) | 현번두(玄蕃頭), 풍전수(豊前守), 식산(式山) |
성별 | 남자 |
생년/일 | 1603년 |
몰년/일 | 1684년 10월 1일 |
출신지 | 강호(江戶) |
가족관계(부,조,외조[모], 장인[처], 형제) | 부: 유천지영(柳川智永) 평경직(平景直)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평조흥(平朝興)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36년 6월 9일, 『효종실록』 6년 1월 25일 |
일본 강호(江戶)시대 대마도 도주의 가신(家臣), 국서개작사건의 당사자.
개설
평조흥은 조·일 간의 국교가 재개되는 과정에서 국서 위조와 개찬(改竄)을 획책하였던 평경직(平景直)의 아들로 1603년 강호(江戶)에서 태어났다. 1613년에 평경직이 사망하자 집안의 대를 이었다. 같은 해 도주 평의지를 수행하여 순부(駿府)에서 덕천가강(德川家康)을 알현한 후 이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덕천가강이 사망한 후 강호에 있는 제2대 장군 덕천수충(德川秀忠)이 있는 곳으로 옮겨 갔다. 이후 대마도의 제2대 도주가 되는 평의성(平義成)의 가신이 되었으나 상호 불화한 중에 국서개작사건(國書改作事件)에 연루되어 처벌받았다.
활동 사항
1598년(선조 31)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고 일본군(日本軍)의 전면 철수가 이루어지자마자 대마도 도주 평의지(平義智)는 조선과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불신이 컸던 조선은 대마도에서 파견한 사자(使者)들을 모두 억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마도에서는 계속해서 사자를 파견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끌려간 조선인 포로(捕虜)들을 송환(送還)하는 등 양국 간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일본 내에서 패권을 장악한 덕천가강(德川家康)은 정권의 안정성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조선과의 전후(戰後) 처리를 완결 짓고 조선으로부터 일본을 대표하는 정권으로 인정받으려 하였다. 따라서 덕천가강은 대마도로 하여금 조선에 평화우호의 뜻을 전달하게 하였고, 대마도에서는 사자를 보내 일본의 내부 상황과 덕천가강의 화친의사를 전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선조실록』 36년 6월 9일).
그 결과 1604년(선조 37) 조선에서 일본의 내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승려 유정(惟政)과 손문욱(孫文彧)을 파견함으로써 비로소 국교회복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들은 덕천가강과 덕천수충(德川秀忠)을 만나 일본의 국정을 살피고 귀국하였다. 조선에서는 장군(將軍)의 국서(國書)와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선대(先代) 왕의 능을 파헤친 범릉적(犯陵賊)을 소환하는 조건을 제시하였고, 이 조건들이 이행된 후 1607년(선조 40) 정사(正使)여우길(呂祐吉) 일행이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강호(江戶)에 파견되면서 양국의 국교가 정식으로 회복되었다. 2년 후인 1609년(광해군 1)에는 양국 간의 통교를 정상화한 조약이라고 할 수 있는 기유약조(己酉約條)가 체결되었고, 1611년부터는 일본의 무역선인 세견선(歲遣船)이 정식으로 조선에 도항해 옴으로써 외교 및 교역 관계가 모두 재개되어 양국 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조선은 대마도 도주에게 경제적 이권을 제공하면서 조선의 수문장(守門將) 역할과 일본 강호막부(江戶幕府)와의 외교 창구의 역할을 전담하게 하였다.
평조흥은 1617년(광해 9), 1624년(인조 2) 조선에서 회답겸쇄환사의 일본 파견교섭 등에 관여를 하면서 조·일 관계뿐만 아니라 대마도 지배 전반에 걸쳐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평조흥은 대마도 도주 평의성보다 한 살이 많았고, 두 사람 모두 비슷한 시기에 집안의 대를 이었다. 두 사람의 불화는 이미 1617년 회답겸쇄환사가 일본에 파견될 때 도주 평의성의 대마도 귀국 요청에 평조흥이 응하지 않음으로써 표면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1631년(인조 9) 평조흥이 도주에게 받았던 토지와 조선에 보내는 세견선에 대한 권리를 되돌려주겠다고 하면서 논쟁이 일어났다. 평조흥은 아버지 평경직이 막부(幕府)의 지시로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조선에서 정식 사자인 회답겸쇄환사를 일본에 오게 한 공으로 도주 평의성에게 내려진 영지 중 일부를 받았던 비전(肥前) 지역의 영지와 할아버지인 평조신(平調信) 대에 조선으로부터 받은 세견선 등 집안에서 보유하고 있는 송사선(送使船)을(『효종실록』 6년 1월 25일) 기반으로 막부의 가신이 되려고 하였다. 이 논쟁 과정에서 평조흥이 국서를 개작하였던 사실을 폭로하면서 근세초기 조·일 관계에 있어서 일대 사건으로 발전하였다. 평조흥이 폭로한 것으로 보아 그는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는 장군 덕천가광이 직접 재판을 하여 1635년에 평조흥이 유죄 판결을 받아 진경(津軽)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리고 국서를 고치는 데 있어서 실무를 담당하였던 자들은 처형되었다. 반면 도주 평의성은 계속해서 조선과의 통교무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덕천가광이 평의성의 과실을 인지하였음에도 평조흥을 처벌한 것은 조선과의 무역을 계속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만일 평의성을 처벌할 경우 왜란 이후 그를 매개로 유지되어 왔던 조선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구축해야 하는 부담이 컸기 때문이었다.
평조흥은 유배지 진경에서 50년 가까이 살았고 1684년(숙종 10) 10월 1일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소
청삼현(靑森縣) 홍전시(弘前市) 경진번주(津軽藩主) 보제사(菩提寺) 장승사(長勝寺).
참고문헌
- 三宅英利 著·손승철 譯, 『근세 한일관계사 연구』, 이론과실천, 1991.
- 손승철 편저, 『근세 한일관계사』, 강원대학교 출판부, 1987.
- 田代和生 著·손승철 譯, 『근세 한일외교비사』, 이론과실천, 1988.
-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 2011.
- 『日本人名大辭典』, 講談社, 2009.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田代和生, 『書き替えられた國書』, 中公新書, 198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