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미일(平彌一)
sillokwiki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평미일 |
한글표제 | 평미일 |
한자표제 | 平彌一 |
동의어 | 종의여(宗義如) |
관련어 | 검약령(儉約令), 대마도(對馬島), 도주(島主), 정언섭(鄭彦燮) |
분야 | 정치/외교/외교사안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일본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허지은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평미일(平彌一)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8년 10월 4일 |
대마도의 제8대 도주.
개설
1716년 제6대 도주(島主) 종의성(宗義誠)의 장남으로 태어난 종의여(宗義如)로 미일은 유명(幼名)이다. 1730년(영조 6년) 종의성이 사망하였을 때 어렸기 때문에 숙부인 종방희(宗方熙)가 대신 뒤를 이었다. 1731년 종방희의 양자가 되었으며, 1732년 종방희가 은거하면서 제8대 도주가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과의 무역 쇠퇴와 1732년과 1734년에 있었던 큰 화재로 대마번의 재정 악화가 가속화되었다. 평미일은 검약령(儉約令)을 시행하고 1746년에는 조선의 통신사 접대를 위해서 강호막부(江戶幕府)로부터 금 30,000냥을 빌리고, 이로부터 매년 10,000냥을 빌리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1750년 돈을 빌려 받는 명목이었던 조선 인삼의 교역이 원활하지 않다는 이유로 중지되었다. 1752년 천연두에 걸려 3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732년 동래부사(東萊府使)정언섭이 평미일이 이름을 고쳤다는 봉행(奉行)의 정서(呈書)에 근거하여 접대하자고 청한 데 대하여 비변사가 1665년(현종 6)에 정해진 새 규약을 따르고 접대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한 기록이 있다(『영조실록』 8년 10월 4일).
참고문헌
- 藩主人名事典編纂委員會, 『三百藩主人名事典』, 新人物往來社, 1987.
- 山本博文, 『江戶三〇〇藩 物語藩史 九州篇』, 新人物往來社, 2015.
- 田代和生, 『近世日朝通貿易史の硏究』, 創文社,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