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강전(浿江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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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통해 평양까지 불법적으로 올라와 인명을 해치고 재물을 약탈하자 평양부민이 공격하면서 벌어진 전투.

개설

1866년(고종 3) 6월 18일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가 천진(天津)에서 출발했다. 이 배에는 대포 2문이 장착되었고, 완전무장한 승무원 19명과 통역자인 영국인 선교사 토머스([崔蘭軒], Robert Jermain Thomas)가 타고 있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대원군에 의한 쇄국정책을 펴고 있어서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국법에 저촉되었다. 이에 조선 관원들은 대동강 어귀에 도착한 이들에게 돌아갈 것을 종용하였으나, 이들은 오히려 식료품을 요구해 받아가면서 대동강을 거슬러 7월 13일 평양 신장포까지 올라왔다. 이들은 거듭된 퇴거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은 물론 야간에는 상륙하여 약탈과 살인까지 자행했다. 평양감사박규수(朴珪壽)는 이런 상황을 조정에 보고하고 격퇴의 명령을 요청한 뒤 대동강의 수위가 낮아져 제너럴셔먼호가 더 이상 출입이 불가능해지자 공격을 명하였다. 24일에 소형 배에 불을 지른 뒤 제너럴셔먼호 쪽으로 보내는 화공을 개시하여 승선원 전원을 죽이고 배를 소각했다.

역사적 배경

19세기 말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동아시아 식민지 건설과 이권침탈은 해당 국가국민들의 불법적인 진출도 야기하였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기독교 포교의 자유, 자유무역 통상 확대를 주요 현안으로 내세우며 진출했으나 그 속셈은 새로운 상품 시장의 개척과 값싼 원료와 노동력의 확보였다. 또한 서구인에게만 유리한 국제법을 이용하여 이윤을 만들려는 시도가 해적 행위를 통해 이루어졌다. 제너럴셔먼호 이후인 1868년에도 독일 상인 오페르트(Ernst Jacob Oppert) 일행이 충청도예산에 위치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의 묘인 남연군묘를 도굴하려고 했듯이 제너럴셔먼호도 동일한 목적으로 평양 대동강에 도착했던 것이다.

발단

1866년(고종 3) 7월 15일 황해감사박승휘(朴承輝)가 올린 장계를 보면 제너럴셔먼호에 탑승한 자들은 자신들의 무력을 믿고 조선의 방어태세를 무시하면서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이르렀다. 장계에 따르면, 8일에 송산리(松山里) 앞바다에 이양선이 정박하자 황해감사는 지방관을 보내어 서면으로 대화해 그들을 정탐하도록 하였다. 배에 탑승해 있던 서양인은 영국, 미국, 덴마크 사람이며 그중 한 명은 중국말을 잘했다. 또한 의사소통은 이팔행(李八行)이라는 중국인이 전담했고 배 안의 일도 그가 주관하였으며 그 외에 광동인, 태국인이 선원으로 있었다. 그들은 7월 1일 산동에서 출발하여 백령도(白翎島), 초도곶(椒島串), 석도(席島)를 거쳐 방향을 바꾸어 평양(平壤)으로 가는 길이라고 목적지를 밝혔다. 평양에 가려는 것은 통상을 위함이며 거절하면 서울로 가서 통상한 뒤에야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지방관이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다고 하자 “누가 감히 우리를 막겠는가? 우리는 곧바로 가려고 한다.”라고 하면서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면서 식료품을 요구해 받아갔다. 배의 좌우에 대포 1문씩을 설치하였으며, 세 차례에 걸쳐 시범 사격을 하였다. 개인 화기는 매우 많았다. 이때 셔먼호를 방문한 문정관(問情官)은 서양인의 용모를 자세히 기록하였다(『고종실록』 3년 7월 15일). 셔먼호에 탑승한 자들은 외교관이나 국가를 대표하는 임무와는 무관한, 이권을 좇던 상인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조선 측에 주장했던 통상 요구나 외교적 수사는 모두 거짓말이며 실상은 일확천금을 차지하기 위한 모험적 해적질과 유사하였다.

1866년 7월에 제너럴셔먼호는 평양 경내의 초리방사포구(草里坊沙浦口), 신장포구(新場浦口)를 거쳐 13일에는 만경대(萬景臺) 아래 두로도(豆老島) 앞에 정박하였다. 이들은 조선 측에 식량을 요구해 받았으며 계속 통상을 요구하였다(『고종실록』 3년 7월 18일). 그런데 7월 19일 이들이 대동강 연변의 상선을 약탈하고 인명을 살상하다가 관원을 억류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고종실록』 3년 7월 22일). 이때 평양감사박규수는 감영(監營)과 평양부(平壤府)에 단단히 경계하여 그들을 소멸하겠다고 보고하였으며, 평양부민이 합심하여 제너럴셔먼호를 공격하는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고종실록』 3년 7월 25일).

경과

평양감사박규수는 제너럴셔먼호를 제압하기 위해 화공을 쓰기로 하고 작은 배에 불을 질러 그 배에 다가가도록 하여 불이 번지게 하였다. 결국 배 안의 사람들은 타 죽거나 익사하였고 토머스와 조능봉(趙凌奉) 등은 체포되었다. 그런데 평양 군인과 백성들이 울분을 참지 못해 그들을 때려죽였고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죽여 버렸다. 당시 겸중군(兼中軍) 철산부사(鐵山府使)백낙연(白樂淵)과 평양서윤(平壤庶尹)신태정(申泰鼎)이 선두에 서서 전투를 지휘하는 등 군민이 합동 작전을 펴서 제너럴셔먼호를 파괴하고 선원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고종실록』 3년 7월 27일).

전투 이후 조선 정부에서는 박규수를 비롯한 관원들에게 특전을 후하게 시행하고, 정부에 바쳐야 할 공곡(公穀)도 삭감해 주었다(『고종실록』 3년 7월 27일). 또한 전투 중에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특전을 후하게 베풀었고, 이 지역민을 대상으로 한 문무과 시험을 실시하는 등 민심을 달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고종실록』 3년 7월 27일).

미국 정부에서는 사건의 전말을 확인하기 위해 몇 차례 군함을 파견하여 제너럴셔먼호의 상황에 대해 묻고, 생존자들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고종실록』 5년 3월 30일). 조선 정부는 생존자가 없다고 하는 한편 이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돌려보냈으나, 결국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1871년에 신미양요가 일어나는 단서가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1967.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 김명호,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박규수」, 『대동문화연구』42,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3.
  • 김원모, 「셔먼호 사건과 미국함대의 침입(1866~1871)」, 『동양학』28,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98.
  • 이상태,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신미양요」, 『군사』14,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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