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귀(頗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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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당시 조선으로 파견되어 종군한 명나라 장수.

개설

파귀는 1597년(선조 30) 8월 흠차통령선대조병원임유격장군(欽差統領宣大調兵原任游擊將軍)도지휘동지(都指揮同知)의 직함을 가지고 조선에 왔다. 파귀는 몽고 계열의 장수로 해생(解生)·양등산(楊登山)·파새(擺賽)와 이름을 나란히 하면서 사장(四將)으로 불렸다.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전공이 많았고, 용맹함으로 이름을 떨쳤다. 1599년(선조 32) 3월에 귀국하였다.

가계

활동 사항

1597년(선조 30) 일본군의 재침으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에서는 경리(經理)양호(楊鎬), 총독(總督)형개(邢玠), 제독(提督)마귀(麻貴) 등으로 하여금 조선을 구원하게 하였다. 파귀는 이해 8월,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서 마병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 선조는 파귀가 입국하자, 즉시 그의 거처로 가서 접견례를 행하였다(『선조실록』 30년 8월 4일). 이튿날 선조는 신하들을 인견하고 파귀의 군사를 전라도 나주로 파견하여 남원을 지원하게 하고자 하였다(『선조실록』 30년 8월 5일).

파귀는 입국 직후에 불미스러운 사태에 직면했다. 그의 휘하 군인 가운데 이종의(李宗義)라는 인물이 경성(京城) 중부(中部)의 골목에서 덕지(德只)라는 여인을 강간하려다 실패하고 상해한 뒤, 이를 목격한 맛산[末叱山]이라는 어린아이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은 사노(私奴) 세형(世亨)의 고발로 인해 드러났는데, 제독마귀가 파귀로 하여금 사건을 조사하게 하였다. 파귀는 덕지의 공초를 사실로 판단하고 마귀에게 보고한 뒤, 종루(鐘樓)에서 이종의를 참수하였다(『선조실록』 30년 8월 7일). 이 사건은 명군에 의해 자행되었지만 파귀가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였으므로 이후에 큰 문제로 번지지는 않았다.

파귀가 입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이 남원성을 함락하여 주민을 몰살하고 북진하였다. 경리양호와 제독마귀는 부총병해생(解生)으로 하여금 이들을 차단하게 하였다. 파귀는 우백영(牛伯英)·양등산(楊登山) 등과 함께 해생을 따라 남하하여 직산의 소사평(素沙坪)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파귀는 이 전투에서 힘껏 싸워 일본군 수급 세 개를 얻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로 일본군의 북상 의지는 한풀 꺾이게 되었다. 전투가 종료되자, 이들은 즉각 회군하여 경성으로 돌아왔다(『선조실록』 30년 9월 9일) (『선조수정실록』 30년 9월 1일).

파귀는 직산 전투에서 장수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수급을 얻었으므로 선조는 곧바로 파귀의 관사를 방문하여 다례(茶禮)와 주례(酒禮)를 행하였다. 파귀는 일본군에 대한 선조의 질문에 대해 ‘55세에 이르도록 각종 오랑캐와 싸워왔지만 왜적과 같은 자들은 없었다’고 하면서도 철기(鐵騎)로 상대할 경우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하였다. 파귀는 일본군에 대한 적대감을 보였고, 또 선조와의 대화에서 시종일관 겸손한 자세를 취하여 선조의 호감을 샀다. 선조는 예물을 증정하고, 파귀에게 절을 하고자 하였으나 파귀가 극구 만류하여 읍(揖)하는 것으로 그쳤다(『선조실록』 30년 10월 3일).

명군은 직산에서 일본군의 기세를 제압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일본군은 여전히 전라도 지역에서 횡행하고 있었다. 경리양호와 제독마귀는 부총병이여매(李如梅)로 하여금 직산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던 파귀 등 네 명의 장수와 5천 명의 군사를 남원과 임실로 파견하였다(『선조실록』 30년 10월 6일) (『선조실록』 30년 10월 7일).

이들은 잠시 머물다가 일시적으로 11월에 상경하였는데, 선조는 이들을 각각 찾아가 접견례를 행하였다. 선조는 이달 19일에 파귀를 재차 방문하여 위로했다(『선조실록』 30년 11월 19일).

1597년(선조 30) 12월, 조선과 명의 연합군은 도산성(島山城)을 공격하였다. 도산성은 당시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주둔하면서 왜성(倭城)을 쌓아 방비가 견고했다. 조·명연합군은 성의 북쪽에 지휘부를 두고, 여러 장수를 배치하여 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감행했다. 이여매와 파새(擺賽)는 강변에서 서생포, 조승훈(祖承訓)과 파귀는 부산 방면을 방어하여 인근 지역 일본군의 지원을 차단하고자 했다(『선조실록』 31년 1월 3일). 조·명연합군은 도산성의 일본군은 곤경에 몰아넣었지만,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결국 인근 지역의 일본군이 출동하여 구원하는 사태가 전개되자 조·명연합군도 포위를 풀고 후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가 끝난 이후, 일부 명군 장수들은 경성(京城)으로 귀환하였지만 다른 일부는 경성의 군량 문제로 인해 인근 지역에 그대로 주둔했다. 파귀는 예천에 주둔하면서 적을 감시하고 북상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선조실록』 31년 2월 18일). 파귀는 해생과 함께 경상우도의 일본군을 섬멸하고 상주에 주둔하였다. 경리양호는 즉각 상주의 군량을 내어 접대하고, 초옥(草屋)을 지어 군대를 휴식할 수 있게 할 것을 요구했다(『선조실록』 31년 3월 1일). 1598년(선조 31) 3월, 경리양호는 사로(四路)로 병력을 배치하여 남해안의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파귀는 이 가운데 동로(東路)에 속하여 군사 2천5백 명을 거느리고 해생과 함께 의흥에 주둔하고 있었다(『선조실록』 31년 3월 29일). 이후 조·명연합군은 세 길로 나누어 재차 일본군의 진영을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공격 이후 일본군은 철수를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명군 장수들도 속속 귀환하였는데, 파귀는 비교적 이른 1599년(선조 32) 3월에 귀국하였다.

참고문헌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김경태, 「임진전쟁기 강화교섭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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