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달역(通達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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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고원에 위치했던 역.

개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통달역(通達驛)은 고원군 서쪽 5리(약 2㎞)에 위치했다. 통달역은 고려시대에도 존재하였는데, 당시에는 삭방도(朔方道)에 소속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통달역은 고산도(高山道)의 소속 역(驛)으로 편성되었다.

내용 및 변천

통달역은 고려시대에도 고주(高州: 현 고원)에 위치했다. 『고려사(高麗史)』「병지(兵志)」 참역(站驛) 조에 의하면, 통달역은 삭방도(朔方道)에 소속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함경도 지역의 역들은 남쪽의 안변 지역으로부터 북쪽의 두만강 연안에 이르기까지 해안가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편성된 교통로를 중심으로 설치, 운영되었다. 이 역들에 대한 역도(驛道) 편성은 몇 차례의 변동을 거친 후에 고산도(高山道), 거산도(居山道), 수성도(輸城道) 등 3개의 역도로 정비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함경도의 역들이 모두 이 3개의 역도로 편제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통달역은 고산도 소속으로 기록되었으며[『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경국대전』과 『대전회통』에도 변함없이 통달역은 고산도에 소속되었다.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긴 했지만 고산도는 대체로 남쪽의 안변에서 북쪽의 함흥 사이에 위치한 역들로 편성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통달역에는 상등마(上等馬), 중등마(中等馬), 하등마(下等馬)가 25마리, 역리(驛吏)와 역노(驛奴), 역비(驛婢)가 모두 459명 배속되어 있었다.

통달역은 남쪽으로는 문천 방면, 북쪽으로는 영흥 방면과 연결되는 한양~경흥간 간선 교통로상에 위치하였다. 통달역에서는 북쪽으로 화원역(和原驛), 남쪽으로 양기역(良驥驛) 등과 연결되었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고원 상발산사(上鉢山社)에 구통달리(舊通達里), 하발리사(下鉢里社)에 본역리(本驛里)라는 지명이 각각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통달역은 원래 구통달리 지역에 있다가 이후 어느 시기에 본역리 지역으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1757년(영조 33)에서 1765년(영조 41)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도 통달역의 위치를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는 달리 고원 읍치 북쪽 5리(약 2㎞)라고 기록돼 있어, 적어도 『여지도서』 편찬 이전에 통달역이 이동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전국의 역들이 폐지되면서 통달역도 폐지되었다.

통달역의 위치는 현재 북한의 행정 구역으로 함경남도 고원군 고원읍에 해당하며, 이동 이전의 위치는 고원군 상산리로 비정된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호구총수(戶口總數)』
  • 정요근,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 정요근, 「조선초기 驛路網의 전국적 재편」, 『조선시대사학보』46, 조선시대사학회, 2008.
  • 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한국평화문제연구소 공편, 『조선향토대백과사전』, 평화문제연구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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