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군(擇君)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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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택군 |
한글표제 | 택군 |
한자표제 | 擇君 |
동의어 | 신택군(臣擇君) |
관련어 | 십구하교(十九下敎), 혼돈개벽(混沌開闢) |
분야 | 정치/용어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이근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택군(擇君)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9년 7월 24일, 『영조실록』 10년 4월 12일 |
신하가 왕을 선택한다는 의미로, 영조 연간 왕이 김창집·이이명의 신원을 요구하는 노론 측을 비판하기 위해 제시한 논리.
개설
택군은 신택군(臣擇君)의 약자로, 신하가 왕을 선택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영조 연간에 노론 측에서 김창집과 이이명의 신원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면서 노론 측의 논리를 비판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다.
내용 및 특징
택군의 논리는 1729년(영조 5) 기유처분(己酉處分) 이후 제기되었다. 기유처분은 노론과 소론, 그리고 남인 모두에게 역(逆)이 있었다고 처분을 내린 것이다. 이때 경종 연간에 화를 당한 노론 사대신 가운데 이건명과 조태채는 신원된 반면 김창집과 이이명은 신원에서 제외되었다. 이러한 기유처분의 조치는 탕평파의 집권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기유처분이 발표되었으나 노론 측은 계속해서 김창집과 이이명의 신원을 요구하였다. 이에 영조는 신하들이 여전히 예전의 구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신택군 혹은 택군설을 제시하였다(『영조실록』 9년 7월 24일).
영조가 제기한 택군설은 숙종 승하 직후부터 1721년(경종 1) 사이에 노론 측이 신하 된 입장에서 왕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숙종 후반 정유독대(丁酉獨對)를 계기로 신료들의 논쟁은 사문(斯文) 시비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충역(忠逆) 논쟁으로 변질되었으며, 경종은 소론의 왕으로, 후일의 영조인 연잉군은 노론의 왕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영조가 이 논리를 제시한 것은 노론 측이 자신의 위상을 한낱 노론의 왕으로 전락시켰다는 우려를 담은 것이다.
변천
택군의 논리는 1733년 십구하교(十九下敎)와 1736년 혼돈개벽(混沌開闢)의 처분에서 다시 한번 거론되었다. 결국 노론의 행동이 반드시 충성된 것만은 아니라고 함으로써 계속되는 노론의 요구를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이다. 당시 사관(史官)은 택군설의 유무에 대해서 알 수 없다는 의견을 피력하면서 노론에게 죄를 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영조실록』 10년 4월 12일). 이는 노론 측의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정만조, 「영조대 중반의 정국과 탕평책의 재정립: 소론 탕평에서 노론 탕평으로의 전환」, 『역사학보』111,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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