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태실(太祖胎室)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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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태조태실 |
한글표제 | 태조태실 |
한자표제 | 太祖胎室 |
상위어 | 왕실출산(王室出産) |
관련어 | 태봉산(胎封山),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 |
분야 | 왕실/왕실문화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김지영 |
장소 |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산4번지 |
관련 인물 | 이성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태조태실(太祖胎室)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2년 1월 2일, 『태조실록』 2년 1월 2일 |
함경남도 영흥에 있던 조선 태조의 태를 충청남도만인산 아래로 옮겨와 새로 조성한 태실.
개설
원래 태조의 태는 무학 대사의 가르침에 따라 함경남도 영흥부 용연(龍淵)에 묻었다가, 왕으로 등극한 후 1393년(태조 2) 1월에 충청남도 진동현(珍同縣)만인산 아래로 옮겨 묻었다. 태조가 이곳을 선택한 것은 한양이 아직 도읍지로 정해지기 전, 새로운 도읍 후보지였던 계룡산과 가까운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태조태실은 일제 강점기에 크게 훼손되었으나, 1993년에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현재의 위치인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1-108번지로 이전해 복원하였다.
위치 및 용도
1393년(태조 2) 1월에, 함경남도 영흥에 있던 조선 태조이성계의 태를 오늘날의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산4번지로 옮겨 와 새로 태실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전국에 산재해 있던 조선 왕실의 태실을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위치한 서삼릉 경내로 대대적으로 이장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태조태실에 봉안되어 있던 태 항아리는 서삼릉으로 이장되었고, 태실의 모습은 크게 훼손되었다. 그 뒤 태조태실이 원래 자리했던 땅의 소유자가 왕실에서 개인으로 바뀌면서 태실 주변의 석물들은 파괴되어 흩어진 채 오래도록 방치되었다. 이후 1989년 4월 20일에 충청남도 유형 문화재 제131호 ‘태조대왕태실’로 지정되면서 비로소 관리되기 시작하였다. 금산군은 1993년에 태조태실을 원래 있던 곳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 복원하였다.
변천 및 현황
태조이성계는 자신의 태를 묻을 좋은 땅을 찾기 위해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권중화(權重和)를 지방으로 파견하였다. 1393년(태조 2) 1월 2일, 권중화는 전라도 진동현에서 태를 묻을 길지를 찾은 다음 태조에게 산수 형세도를 바쳤다(『태조실록』 2년 1월 2일). 태조는 1월 7일에 다시 권중화를 보내 이곳에 태실을 조성하게 하였다. 그리고 완산부에 속해 있던 진동현을 진주(珍州)로 승격시켰다.
태조태실은 조성된 이후 지속적으로 석물의 보수가 이루어졌다. 왕의 태실은 태실이 위치한 지방의 지방관이 관리하게 되어 있었다. 만약 태실이 훼손되면 지방관을 거쳐 왕에게 그 사실이 보고되었고, 빠른 시일 내에 복원하도록 조치가 취해졌다.
조선 전기, 태조태실이 조성될 당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에 비해 조선 후기의 현황은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숙종 대에 자연재해로 인해 태조태실의 석물이 크게 손상됨에 따라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태봉등록』에 따르면, 1686년(숙종 12) 8월 초에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태실 주위에 심었던 소나무들이 부러졌고, 그로 인해 태실의 석물들이 크게 손상되었다. 그해 11월에 예조 참판심재(沈梓)가 진산군(珍山郡)에 내려가 봉심한 뒤 이 사실을 숙종에게 보고하였다. 숙종은 이듬해 가을에 석물을 보수하도록 지시했으나, 그해 전라도의 흉년이 심하여 다음 해로 미뤄졌다. 1688년(숙종 14)에는 8월에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가 승하하는 바람에 석물 보수를 다시 봄으로 미루었다. 그 뒤 1689년(숙종 15) 3월 19일에 마침내 공사를 진행하였는데, 개첨석·중대석·귀대석 등만 그대로 두고 나머지는 태실가봉(胎室加封)과 다름없을 정도로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이때 1584년(선조 17)에 건립한 비석도 손상이 심하여 새로 중건하였다.
이후 태조태실은 영조와 고종 대까지 큰 변화 없이 잘 관리되었다. 1726년(영조 2)의 보수는 중대석이 흔들려서 밀려 나가는 것을 바로잡고, 태실을 그늘지게 가리는 나무를 벌목하거나 가지를 치는 정도로 이루어졌다. 1866년(고종 3)에는 그 전해에 진산군에 사는 김치운이 태조태실 근처에 아내의 묘를 썼다가 이를 다시 파간 것이 발견되면서 보수가 이루어졌다. 이때에도 영조 대와 마찬가지로 내상석과 중대석이 흔들리는 것을 수리하였다. 그리고 묘를 파간 곳을 다시 메우고, 금표 안의 빈터에 돌과 소나무를 옮겨 심었다.
태조태실이 가장 크게 훼손된 것은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서이다. 1928년에 이왕직(李王職)에서는 전국에 산재한 태실을 관리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고양시에 자리한 서삼릉으로 왕실의 태실을 이전했는데, 태조태실은 이때 크게 훼손되었다. 그 당시 태실 주변의 석물은 옮길 수 없었으므로 태실에 안치되어 있던 태 항아리만 서삼릉으로 옮겼다. 그 주변 석물들은 1980년대 후반까지 방치되어 있다가, 1989년에야 충청남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원래 태조태실이 조성되었던 위치가 아닌 인근으로 옮겨져 복원되었다.
형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태조대왕 태실수개의궤(太祖大王 胎室修改儀軌)』는 1866년까지 전해지던 태조태실의 형태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태실에 안치했던 태조의 태를 넣은 태 항아리는 1929년에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 경내로 이장되었다. 1996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일제 강점기에 서삼릉으로 이장된 54기의 태실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 당시 태를 넣어 둔 태내 항아리는 이미 도굴된 상태였고, 태내 항아리를 넣어 두었던 태외 항아리는 파괴된 채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관련사건 및 일화
태조의 태실을 만인산에 조성하게 된 일화가 전한다. 조선 초에 한 시인이 전국의 명산대천과 명승고적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만인산을 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고는 산의 모양이 깊고 두터우며, 굽이굽이 겹쳐진 봉우리는 연꽃이 만발한 것 같고, 계곡의 물은 한곳으로 모여든다고 찬양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왕실에서는 지관을 보내 그 땅을 답사하게 하였고, 무학 대사의 가르침에 따라 만인산의 남쪽 산허리에 태조의 태실을 조성하게 되었다. 그 뒤 만인산을 태봉산(胎封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편 왕실의 태실을 명당으로 인식한 지방민이 태조의 태실 근처에 묘를 썼다가 오히려 화를 입은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사실이 나중에 발각되어 고종에게까지 보고되었고, 김치운은 세 차례의 형신을 받고 황해도백령진(白翎鎭)에 있는 섬으로 유배되었다.
참고문헌
- 『增補文獻備考』
- 국립문화재연구소, 『國譯 胎封謄錄』, 2006.
- 국립문화재연구소, 『西三陵胎室』, 1999.
-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실의 안태와 태실관련의궤』, 민속원, 2006.
- 이규상, 『韓國의 胎室』, 청원군 청원문화원,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