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재부(太宰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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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국(國) 가운데 축전국(筑前國)에 설치되어 구주(九州)의 행정관리 이외에 대외 국사·외교 업무를 담당하였던 지방관청이자 지명.

개설

태재부라는 호칭은 671년 처음 기록에서 나타나며 690년에는 태재부의 관제가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태재부의 중심 시설이 설치된 지역은 서일본(西日本)의 정치·문화·외교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외교면에서는 북구주(北九州) 지역이 이전부터 중국과 한반도 등과 교류할 때 현관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해외사절을 접대하기 위한 영빈관인 홍로관(鴻臚館)이 나진(那津: 현 박다만(博多灣)) 연안에 설치되었다. 태재부는 중세시기까지도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중세도시의 명칭으로 쓰이기도 하였는데 이때는 태재부 또는 재부(宰府)로 쓰였다.

조선의 기록에도 태재부가 몇 번 언급되는데, 1414년(태종 14)에 축주(筑州) 태재부(太宰府) 사마 소경(司馬少卿) 등원만진(藤源滿眞)이 사자(使者)를 보내 예물을 바치고 범종(梵鍾)을 요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태종실록』 14년 6월 28일). 1424년(세종 6)부터 1504년(연산군 10)까지 태재부에서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세종실록』 6년 8월 21일](『연산군일기』 10년 3월 17일). 이때는 모두 지명을 지칭하였다.

위치 비정

복강시(福岡市)의 남동쪽, 복강평야와 축자(筑紫)평야의 중간에 위치하며, 남쪽으로 배진산(背振山)이 북쪽으로는 사왕사(四王寺)산맥, 북동쪽으로 보만산(寶滿山)이 있다. 그리고 북쪽에 있는 박다만으로 흘러가는 어립천(御笠川)·노전천(鷺田川)과 남쪽의 유명해(有明海)로 흘러가는 보만천(寶滿川)의 분수령이 되었다.

참고문헌

  • 『日本大百科全書』, 小學館, 1987.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吉田茂樹, 『日本地名大事典』, 新人物往來社, 2004.
  • 三省堂編修所, 『日本地名事典』, 三省堂, 2007.
  • 平凡社地方資料センタ, 『日本歷史地名大系』, 平凡社, 1986.
  • 박석순, 「고대 동아시아의 관문 다자이후」, 『한일관계 2천년 보이는 역사, 보이지 않는 역사』, 경인문화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