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인현(泰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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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정읍시 신태인군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고려 때 고부군에 소속된 대산군과 인의현에 감무가 파견되었는데, 그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이 건국한 후에는 현감(縣監)으로 바뀌었다. 1409년(태종 9)에 태산현(泰山縣)과 인의현(仁義縣)를 통합하여 태인현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태인현이 관할해 오던 3향과 2부곡을 폐지하여 태인현에 편입하였다. 1415년(태종 15)에는 치소(治所)를 두 고을의 중간 지점인 거산역(居山驛)으로 옮겼다. 1455년(세조 1)에 태인현은 전라도 전주도(全州道)의 우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는 태인현이 전라도 7진 가운데 하나인 전주진(全州鎭)에 속했다. 1777년(정조 1)에 극적(劇賊)이 태생한 고을이라 하여 읍격의 강등이 있어서 태인현의 서열이 여러 고을의 끝으로 옮겨졌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태인현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고려에 와서 이전의 대산군(大山郡)을 폐지하고 고부군(古阜郡)에 소속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뒤에 감무를 두고 인의현을 겸임하였다. 1354년(고려 공민왕 3)에 이 현 사람인 원나라 사신 임몽고불화(林蒙古不花)가 우리나라에 공이 있다 하여 군으로 승격시켜 지군사(知郡事)로 하였다. 인의현도 고려에 와서 고부군에 소속시키고 대산감무가 겸임하였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조선이 건국한 후 그것을 모두 현감으로 고쳤다.

1409년에 전라도 태산(泰山)과 인의(仁義)를 합하여 태인현으로 만들었다(『태종실록』 9년 1월 18일). 1415년에는 치소를 두 고을의 중간 지점인 거산역으로 옮겼다(『태종실록』 15년 8월 10일).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이때 태인현이 관할해 오던 3향과 2부곡이 폐지되어 태인현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3향은 나향(羅鄕)·능향(綾鄕)·제견향(堤見鄕)이며, 2부곡은 대곡(大谷)·개문(開門)이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태인현에 종6품 현감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현감은 종6품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다. 훈도는 5백 호 이상인 고을에는 모두 두기로 한 것에 따른 것이다(『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태인현감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현감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현감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변천

1414년(태종 14)에 왜인 32인을 대마도에 돌려보냈다. 1410년(태종 10)에 투항한 이들을 태인과 장성 등지에 나누어서 억류하였는데, 대마도주 종정무(宗貞茂)가 그들을 돌려 달라고 요청하여 조선 조정이 수용한 것이다(『태종실록』 14년 3월 24일).

1777년에 극적이 태생한 고을이라 하여 태인현의 서열을 여러 고을의 끝으로 옮겨 놓았다(『정조실록』 1년 8월 28일). 이것은 고을을 폐지한 것은 아니지만 군현의 서열을 후순위로 낮춘 것으로 일종의 읍격 강등이라고 볼 수 있다.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나누어서 소속을 정하였다. 이때 태인을 전라도 전주도의 우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각 도에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태인현은 전주진에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1871년(고종 8)에 삼군부(三軍府)가 전라도의 각 군에 포군(砲軍)을 설치하였는데, 이 가운데 태인현에 화포군(火砲軍) 29명을 두었다(『고종실록』 8년 4월 29일).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태인현이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북도는 수부(首府)를 전주에 두었으며, 태인군을 비롯한 26개 군으로 편성되었다. 1914년에는 그것이 정읍군으로 통폐합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
  • 『정읍시사』, 정읍시사편찬위원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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