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전(풍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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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에 서경인 평양에 세운 풍경궁의 정전.

개설

1902년(광무 6)에 중국의 한나라나 당나라 등이 2개의 수도를 운영한 예에 따라 평양에 세운 풍경궁(豐慶宮)의 정전(正殿)이다. 한때 고종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위치 및 용도

1902년에 궁내부(宮內府) 특진관 김규홍(金奎弘)은 서경(西京)에 이궁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동양의 제도를 보면 주(周)나라, 한(漢)나라, 당(唐)나라, 명(明)나라가 모두 2개의 수도를 운영했다는 근거를 들어 대한제국 역시 2개의 수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종실록』 39년 5월 1일).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행궁을 건설하고, 궁궐의 명칭을 풍경궁이라고 했다. 전각의 명칭은 태극전(太極殿), 지덕전(至德殿), 중화전(重華殿), 황건문(皇建門), 건원문(建元門), 대유문(大有門)이라고 했다.

이 중 태극전이 풍경궁의 정전이었다. 풍경궁의 전각은 600여 칸 정도로 계획했고, 궁궐 담장은 벽돌을 이용해 쌓았다. 궁궐을 짓는 공사는 1903년(광무 7)에 진행해 11월경에 태극전과 중화전이 완공됐다. 이들 건물이 완성된 후 고종의 어진을 태극전에, 순종의 예진을 중화전에 봉안하는 일이 진행됐다(『고종실록』 40년 11월 6일). 태극전과 중화전은 완공됐지만 그밖에 다른 전각의 공사는 1904년(광무 8) 러일전쟁의 영향으로 중단됐다. 『승정원일기』 1905년(광무 9) 6월 18일자에 기록된 최익환(崔益煥)의 상소에 따르면, 지덕전과 강복전(康福殿)은 겨우 기와만 얹은 상태에서 일을 멈췄고, 바깥 금원(禁垣) 주위는 그 터만 쌓고 그쳤다. 또 담장을 쌓는 공사의 비용은 청나라 장인에게, 시위대(侍衛隊)의 포대(砲臺)를 쌓는 비용은 일본인에게 이미 지급했는데 일을 마치지 않았다고 했다. 이후 공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1908년(융희 2)에는 태극전에 봉안했던 고종의 어진과 중화전에 봉안했던 순종의 어진을 모두 경운궁 정관헌(靜觀軒)으로 옮겼다(『순종실록』 1년 11월 18일). 이때 풍경궁이 폐지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대한제국기에 한양의 경운궁 즉조당(卽阼堂)의 명칭도 한때 태극전이였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1897년(광무 1) 10월 7일에 즉조당에 태극전이라는 편액을 걸고, 황제 즉위 조서를 반포하였다. 그러나 5개월도 되지 않아 전각의 명칭을 태극전에서 중화전(中和殿)으로 변경하였다(『고종실록』 35년 2월 13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