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원현(漆原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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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칠원현(漆原縣)은 신라의 칠토현(漆吐縣)에서 기원한다. 신라 경덕왕 때 칠제현(漆隄縣)으로 개명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칠원현이 되어 김주(金州: 현 경상남도 김해시 일원)의 속현(屬縣)으로 편성되었다.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지방관인 감무(監務)가 처음으로 파견되었으며, 조선 건국 후에도 감무가 현감(縣監)으로 개칭되었을 뿐 칠원현은 그대로 이어졌다. 칠원현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한때 창원(昌原)에 병합되었으나, 1617년(광해군 9)에 복구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칠원군이 되었으나, 1908년(순종 1)에 함안군(咸安郡)에 합병되었다. 조선시대에 칠원현은 현재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칠원현은 신라의 칠토현에서 기원한다. 신라 경덕왕 때 칠제현으로 개명하였고, 고려초기에 칠원현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김주의 소속이 되었다가 1390년에 감무가 처음 파견되었으며, 조선 건국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다만 1413년(태종 13)에 감무가 현감으로 개칭되었다.

조직 및 역할

칠원현은 신라 경덕왕 때 9주 중 양주(良州) 관할하에 있던 의안군(義安郡)의 영현(領縣)으로 편제되었다. 당시 칠원현에는 지방관으로 소수(少守) 혹은 현령(縣令)이 파견되었다. 고려시대에 칠원현은 김주의 소속으로 편성되었기 때문에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그 대신 칠원현에는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읍사에서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고려말기인 1390년에 지방관인 감무가 처음으로 파견되었고,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단 1413년에 감무가 현감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칠원현감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종6품의 현감과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18세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6품의 무관(武官)이 현감으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30명, 인리(人吏) 24명, 지인(知印) 15명, 사령(使令) 16명, 관노(官奴) 26명, 관비(官婢) 26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종6품의 현감이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시대에 칠원현의 읍치와 관아는 현재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구성리, 용산리 지역에 위치하였다.

변천

칠원현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던 까닭에 전쟁 직후 고을의 읍세를 유지하기 어려워 인접한 창원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칠원현은 1617년에 다시 복구되었다. 이후 1895년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칠원군이 되어 진주부(晉州府)의 관할에 속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칠원군은 경상남도 관할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으나, 1908년에 함안군에 합병되었다(『순종실록』 1년 9월 14일).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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