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건사(七件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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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명과 일본이 강화교섭을 벌일 때 일본이 요구했던 일곱 가지 강화조건.

개설

임진왜란 당시 명이 조선에 원군을 파견한 이유는 일본군의 중국 본토 침입 차단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벽제관(碧蹄館) 전투에서 패하자 명은 강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경우 처음 전쟁을 시작할 때에는 명으로의 진출까지 생각했지만 명군 참전 이후 그것이 여의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또 조선 수군과 의병의 활약 등으로 군수품 보급과 군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소서행장(小西行長) 등 일본군 중 일부 세력은 강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명과 일본의 강화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이유는 일본이 요구하는 조건들이 명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명과 일본의 외교담당자들은 강화 조건의 내용을 위조하였고, 이는 곧 일본군의 2차 조선 침략으로 이어지게 된다.

역사적 배경

명군 파견 후 일본군은 강화에 적극적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명의 심유경(沈惟敬)은 1592년(선조 25) 8월 30일 평양성에서 소서행장 등과 함께 이틀에 걸쳐 회담을 진행했다. 회담 결과 풍신수길(豊臣秀吉)을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고 조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50일간 잠정적 휴전을 가지기로 합의했다. 9월 10일 심유경은 강화의 내용을 명 황제에게 알렸지만 명은 조선에 대한 원군 파병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파병을 위한 시간을 벌어야 했고, 이를 위해 심유경은 11월 26일 다시 일본군 진영으로 향했다. 심유경은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등 조선의 두 왕자 석방과 일본군 철수를 요구했고, 일본은 책봉과 조공[封貢] 허락과 책봉사 파견을 요구했다. 교섭이 타결을 보지 못하자 다시 휴전하기로 하여 명은 파병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1593년(선조 26) 1월 8일 명군이 평양성을 공략하면서 명과 일본 간의 화의 교섭은 파기되었다. 하지만 명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한 후 화의를 통한 종전을 결정지었고, 이로써 명과 일본 간의 강화회담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발단

1593년 3월 7일 명의 부총병사대수(査大受)가 일본군 진영으로 파견되었다. 일본군은 철수를 조건으로 명의 대일강화사 파견, 명군의 철수, 왕자와 대신의 송환, 일본군의 한성 철수 등의 조건을 제시했다. 명의 경략(經略)송응창(宋應昌)은 명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여 사용재(謝用梓)와 서일관(徐一貫) 등을 일본에 보내 풍신수길의 항복문서를 받아오도록 지시했다. 그해 5월 명 사신 사용재와 서일관 등은 일본의 비전(肥前) 명호옥(名護屋)에 도착하여 강화협상을 벌였다. 이때 풍신수길은 강화를 위해 일곱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조선에 돌아온 명 사신은 이 사실을 조선에 비밀로 하고 풍신수길이 명의 책봉과 조공을 희망한다는 내용으로 문서를 변조하여 명에 알렸다. 일본 역시 명이 요구한 풍신수길의 항복문서를 위조하여 명에 전달함으로써 강화를 이루려고 하였다. 하지만 조선에서도 일본이 요구한 조건들의 내용이 알려지게 되었다.

『선조실록』은 일본이 강화를 위해 화친(和親), 할지(割地), 구혼(求婚), 봉왕(封王), 준공(準貢), 망용의(蟒龍衣), 인신(印信) 등의 일곱 가지 조건을 내걸었음을 기록하고 있다(『선조실록』 26년 11월 21일). 구체적으로는 명의 공주를 일본 천황의 왕비로 삼을 것, 감합무역의 복구, 명과 일본의 군사조약, 한성과 부근의 4도를 할양하고 조선 왕자 1명과 대신을 볼모로 보낼 것, 일본군이 사로잡은 임해군과 순화군의 방면, 조선 조정과 중신의 각서 작성 등이다. 이후 조선 조정은 풍신수길이 요구한 일곱 가지 조건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였다(『선조실록』 26년 윤11월 22일). 일본과의 강화와 풍신수길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던 조선은 이러한 사실을 명에 알려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강화는 기정사실화되어 갔다.

경과

강화를 주도한 송응창이 탄핵을 받아 2년 후인 1595년에야 명은 일본에 책봉사를 파견하였다. 그런데 강화의 전제조건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 명의 봉왜정사(封倭正使)이종성(李宗城)이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서 머물고 있다가 탈주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명은 다시 양방형(楊方亨)을 정사, 심유경을 부사로 임명하여 강화교섭에 임하도록 하였고, 조선 역시 명과 일본의 요구에 따라 1595년(선조 28) 6월 황신(黃愼)을 정사, 박홍장(朴弘長)을 부사로 삼아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참고문헌

  • 기타지마 만지 지음, 김유성 이민웅 옮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 2008.
  • 北島万次, 『豊臣政權の對外認識と朝鮮侵略』, 校倉書房, 1990.
  • 김경태, 「임진전쟁기 강화교섭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 김문자,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책봉문제와 임란기의 강화교섭 : 정유재란의 원인을 중심으로」, 『중앙사론』36, 중앙대학교 중앙사학연구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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