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지패(忠州之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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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27일 임진왜란 당시 신립(申砬)이 지휘한 조선군이 일본군과 충주 지역에서 벌인 전투.

개설

조선 조정은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신립으로 하여금 일본군과 맞서게 하였다. 하지만 신립이 거느린 8,000여 명의 조선군은 소서행장(小西行長)이 거느린 15,000여 명의 일본군에게 패하였다. 충주 전투에서 신립이 패하자 선조는 4월 30일 도성을 비우고 피난길에 올랐다. 이후 조선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고, 일본군은 쉽게 한성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역사적 배경

1592년(선조 25) 4월 14일 부산진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한성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북진하였다. 부산에서의 패전 소식을 들은 선조는 17일 신립을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에 임명하면서 보검을 하사하였다(『선조실록』 25년 4월 17일). 신립은 여진족 니탕개(尼湯介)의 난을 진압하는 등 장수로서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일본군을 막도록 했던 것이다.

발단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이후, 4월 25일 조선 조정이 파견한 순변사(巡邊使)이일(李鎰)의 군대를 상주에서 물리쳤다. 이튿날 문경마저 함락시킨 일본군은 27일 새재[鳥嶺]를 넘기 시작했고, 28일 충주 남쪽에 있는 단월역(丹月驛)에 도착하였다.

4월 26일 신립은 종사관(從事官)김여물(金汝物)과 함께 8,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충주로 향했고, 충주목사(忠州牧使)이종장(李宗長)과 상주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이일이 신립이 거느린 군사에 합류하였다.

일본군을 맞아 이일과 이종장 등은 험준한 지형인 새재에 군사를 매복시켜 높은 곳에서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신립은 기병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평야지대에서 전투를 벌인다는 작전을 세웠다.

경과

1592년 4월 27일 일본군은 조령을 넘어 충주로 진격해 왔다. 이 사실을 척후장(斥候將)김효원(金孝元)과 군관안민(安敏)이 신립에게 보고했지만, 신립은 이를 믿지 않고 두 사람을 참형에 처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중앙에서는 소서행장, 왼쪽에서는 종의지(宗義智), 오른쪽에서는 송포진신(宋浦鎭信) 등 3면에서 조선군을 포위하였다. 신립은 단월역 앞에서 달 모양의 언월진(偃月陣)을 치고 일본군을 맞아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전투는 조선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신립은 기병 1,000여 명을 출전시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이어 다시 1,000여 명으로 하여금 일본군을 공격하도록 하여, 일본군을 단월역 부근으로 퇴각시켰다. 일본군이 병력을 증강시켜 공격해오자 2,000여 명을 동원하여 일본군을 물리쳤다. 하지만 조선군은 수적으로 열세였다. 뿐만 아니라 단월역 부근은 길이 비좁고 논밭이 많아 기병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없었다.

전투가 지속되면서 조선군은 조총(鳥銃)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전세가 기울자 신립은 탄금대(彈琴臺)에서 투신하여 자결하였고, 이종장은 전사하였다. 조선군에게 승리를 거둔 일본군은 충주성을 점령하였다.

충주 전투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 확인해야 할 사항들이 있다. 먼저 전투가 벌어진 곳이 어디였는가에 관한 것이다. 흔히 탄금대 전투라고 해서 지금의 탄금대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신립이 진을 치고 적과 전투를 벌인 곳은 단월역 앞이며 투신하여 자결한 곳이 탄금대이다(『선조실록』 25년 4월 17일). 한편, 신립이 자결하지 않고 살아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했다(『선조실록』 25년 5월 6일). 하지만 이는 신립이 강에 투신하여 시신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신립과 함께 투신한 것으로 알려진 김여물 역시 신립과 함께 투신하였다는 기록도 있고, 이종장과 함께 적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충주 전투에서 조선군이 패한 결정적 요인은 신립이 새재가 아닌 달천평야에서 적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다. 새재는 부산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최단거리에 존재하는 만큼 방어상 중요 지역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신립의 입장에서는 죽령(竹嶺)이나 추풍령(秋風嶺) 등의 우회로가 존재하는 만큼 조령만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군은 3개로로 북상하고 있었던 만큼, 새재에서 일본군을 막다가 우회한 일본군에게 고립될 가능성도 있었다.

충주는 우리나라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핵심지역이다. 즉 일본군으로서는 충주를 장악하지 못하면 병력과 군수품 수송에 애로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신립은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조선군의 장점인 기병을 활용하기 위해 충주에서 전투를 벌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난중잡록(亂中雜錄)』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징비록(懲毖錄)』
  • 류재성, 『한민족전쟁사』Ⅲ, 국방부군사연구소, 1996.
  • 방기철, 『한국역사속의 전쟁』, 새문사, 2014.
  • 온창일, 『한민족전쟁사』, 집문당, 2008.
  • 이형석, 『임진전란사』중, 신현실사, 1977.
  • 프로이스 저, 오만·장원철 옮김,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부키, 2003.
  • 이상훈, 「신립의 작전지역 선정과 탄금대전투」, 『군사』87,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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