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후(筑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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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복강현(福岡縣)의 남쪽 지역을 일컫던 옛 지명.

개설

구주(九州)의 북쪽 중앙에 위치하였으며, 7세기 말에 축자국(筑紫國)이 분할되어 축전국(筑前國)과 함께 성립되었다.

명칭 유래

처음에는 축자국이라고 하였으며, 축자군(筑紫君)의 본거지였다. 7세기 말 율령제(律令制)가 성립되면서 축전국·축후국으로 분할되었다. 분할 당시에는 축자후국(筑紫後國)이라고 하였다가 이후에 축후국이 되었다.

형성 및 변천

내랑(奈郞)시대부터 명치(明治)시대 초기까지 일본의 지리 구분의 기본단위였던 국(國)의 하나로 서해도(西海道)에 위치하였다. 7세기 말에 성립되었으며, 전국(戰國)시대에는 대우씨(大友氏)가 군사와 민정을 감독하는 직책인 수호(守護)가 되었다. 강호(江戸)시대는 구류미번(久留米藩)·류하번(柳河藩)·삼지번(三池藩)이 설치되었다.

한편, 조선초 조선 정부는 왜구에 대한 문제를 교린(交隣)의 차원에서 처리하였다. 특히 일본과의 교린 관계는 당시 일본의 실세였던 실정막부 정권에 한정된 것이 아닌 구주의 대내씨, 소이전(小貳殿), 대마도주(對馬島主) 등을 상대로 한 다원적 교린 관계였다. 조선 정부는 그들에게 조공을 허락하여 경제적 대가를 주는 한편 왜구의 단절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축후국에서도 1454년(단종 2)부터 1454년(연산 10)까지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단종실록』 2년 9월 2일)(『연산군일기』 10년 3월 12일). 1871년 명치(明治) 신정부에서 번(藩)을 폐지하고, 지방통치기관을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부(府)와 현(縣)으로 일원화한 폐번치현(廢藩置縣)을 시행하면서 구류미번·류하번·삼지번은 각각 현이 되었고, 축후국은 소멸되었다.

위치 비정

현재의 복강현 남쪽 지역에 해당한다. 동쪽은 풍후국(豊後國: 현 대분현(大分縣))에, 남쪽은 비후국(肥後國: 현 웅본현(熊本縣))에, 서쪽은 비전국(肥前國: 현재 좌하현(佐賀縣))에 접하고 있으며, 서남쪽에 걸쳐 유명해(有明海)에 면하고 있다. 북쪽은 축전국(현 복강현)에 접하고 있다.

참고문헌

  • 한일관계사학회, 『한국과 일본, 왜곡과 컴플렉스의 역사 2』, 자작나무, 1998.
  • 『日本大百科全書』, 小學館, 1987.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吉田茂樹, 『日本地名大事典』, 新人物往來社, 2004.
  • 三省堂編修所, 『日本地名事典』, 三省堂, 2007.
  • 平凡社地方資料センタ, 『日本歷史地名大系』, 平凡社,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