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수행궁(椒水行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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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실 사람들의 온천욕을 위해 온천 지역에 건설한 행궁.

개설

초수(椒水)란 후추 맛이 나는 물이라는 뜻으로서 온천을 의미했다. 온천욕을 통해 질병을 치료하는 온천 요법은 고대로부터 동양 의학에서 선호하는 질병 치료법이었다. 한국사에서도 삼국시대부터 온천욕을 이용한 역사가 있었다. 그런데 온천을 이용한 질병 치유는 그 특성상 국왕이 온천지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이에 따라 국왕과 관리들이 온천욕과 정무 활동, 숙식을 할 수 있는 임시 거처로서 행궁을 건축하였다. 조선시대에 온천지역에 세워진 행궁을 초수행궁 또는 ‘온궁(溫宮)’이라고 하였는데, 대표적인 온궁이 온양행궁이었다.

위치 및 용도

조선시대 초수행궁은 전국의 온천지역에 건설되었으며 왕실 사람들의 온천욕을 위해 건설되었다.

변천 및 현황

초수행궁의 건립은 조선 세종대부터 시작되었다. 세종은 1444년(세종 26) 1월 청주에 초수행궁을 건설하게 하였는데(『세종실록』 26년 1월 27일), 그곳의 초수로 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세종은 온양에도 초수행궁을 건설하게 하여 치료에 활용하였다. 세종은 민폐에 대한 우려로 작고 소박한 행궁을 건립하였으며, 국왕뿐 아니라 병든 사대부와 일반 백성도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임진왜란 중 충청도 지역의 초수행궁이 불탄 후 오랫동안 온궁은 방치되었고 국왕의 온행도 중단되었다. 조선후기 국왕의 온천행이 재기된 것은 현종대이다. 이후 숙종, 영조, 장헌세자(莊獻世子)까지 4대 95년간에 국왕과 왕세자의 온양온천 행차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1904년(광무 8)부터 온양행궁이 일본인들에게 넘어가고 행궁 터에 숙박시설이 지어지면서 온양행궁도 자취를 감추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형태

현재 조선시대 초수행궁 중에서 그 형태가 가장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온양행궁이다. 1795년(정조 19)에 발간된 『온궁사실(溫宮事實)』에 수록된 「온양별궁전도(溫陽別宮全圖)」에 의하면, 온양행궁은 2중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내궁장(內宮墻)의 가운데에는 국왕과 왕후의 숙소인 내정전과 왕과 신하가 국사를 논하는 외정전이 있었고 옆에는 목욕 시설인 탕실이 있었다. 내정전은 정면 4칸, 측면 4칸의 16칸이었고 외정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12칸이었으며 탕실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12칸이었다. 그 외 왕자방, 의대청, 내수라간, 온천 구탕, 영괴대, 신정비각, 종친부 등이 있었다. 이 내궁장과 외궁장(外宮墻) 사이에는 왕을 보필하는 궐내 각사들이 옮겨와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위치하는데 와가(瓦家), 초가로 되어 있는 여러 채의 집들이 산재되어 있었다. 탕실은 목욕 공간으로 온천물이 용출하는 온정(溫井)을 가운데 두고 동서로 각각 1칸 반의 크기인 욕실 2개가 있었고 이에 딸린 부속 시설로 욕실별로 온돌 1칸 반, 협실 1칸, 사방으로 문을 내어 시원하게 만든 방인 양방(凉房) 1칸 등이 위치하고 있었다. 온정은 옥돌로 함 가운데를 빙 둘러 붙였다. 이곳에는 중국의 온천에서 볼 수 있는 거북이나 물고기, 게와 같은 동물이나 연꽃과 마름과 같은 식물을 형상화한 장식물과 완상할 만한 보옥이나 기교 있게 새긴 치장이 없었다. 하지만 돌의 재질이 뛰어나고 제작이 완벽하고 치밀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조선시대의 초수행궁 중에서 가장 애용된 것은 온양행궁이다. 온양행궁은 조선전기의 세조는 물론 조선후기의 현종, 숙종 등도 애용하였다. 또한 1760년(영조 36) 7월에는 사도세자가 온양행궁에 행차하여 서쪽 담장 안에서 표적을 정해 활쏘기를 한 후 품(品)자 형태로 세 그루의 회나무를 심었다. 훗날 정조가 이것을 기념하여 영괴대(靈槐臺)를 세웠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원궁사실溫宮事實』
  •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
  • 김일환, 「조선시대 온양 행궁의 건립과 변천 과정」, 『인문과학논총』29, 순천향대학교, 2011.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국사편찬위원회, http://www.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