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야(淸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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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이 쳐들어오면 들판을 비워 적군이 군량 등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전술.

개설

청야입보란 군사적 요충지에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견고한 성곽을 쌓아 군사 기지화하는 동시에 주변의 토지를 경작하여 군량을 생산하고 유사시에는 주변 토지의 농작물을 거두어 성에 들어가 방어하여 적군이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지 못하도록 하는 전법으로 정의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청야라는 개념이 나오는 것은 고구려시대로 최초로 청야입보 전술이 거론된 것은 고구려 때인 172년(고구려 신대왕 8) 11월 한나라의 대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였을 때로 이해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때 고구려의 신하들은 고구려의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므로 병력을 출동시켜 막을 것을 건의하였으나 재상인 명림답부(明臨答夫)는 적군이 먼 곳에서 왔으므로 성을 견고히 하면서 성 밖 들판에 곡식과 사람을 모두 비워놓고[淸野] 기다리면 적이 퇴각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청야입보 전략을 채택하여 고구려는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고 한다.

내용 및 특징

청야입보에 의해 적군이 피곤하면 지친 적을 기습적으로 반격하여 격멸하는 것이 기본적인 작전 개념이었다. 이 작전 개념은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5세기 이후에도 계속 적용되었는데 이는 광대한 국경선에 병력을 모두 배치할 수 없는 약점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고구려가 채택한 것이라는 것이다.

변천

고려는 몽골과의 전쟁에서 이전의 전쟁수행 방식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 즉 고려가 전쟁을 주도하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군사력 운용이 아닌 강화도 등의 도서지역이나 험준한 산성을 이용한 소극적인 방어 전략으로 일관하였다. 이는 무신정변에 따른 정치적 변동과 관련이 있다. 최충헌의 집권 이전 여러 차례의 무신 간의 상쟁과 정변으로 인한 집권 세력의 잦은 교체는 고려 군사력이 국방이 아닌 정치적 수단으로 변질되도록 하였다. 이에 국가 방어를 위한 군사력의 확대보다는 정치적 수단으로서 군사력이 중요시되었다. 무인 집정을 위한 친위 군사력인 이른바 사병(私兵)의 등장과 확대가 바로 그것이다. 사병의 발달로 인해 고려 중앙군의 충원은 어렵게 되었으며 점차 무력화되었다. 이는 고려의 전반적인 국방력 약화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기 동안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전국 주요 지점에 산성을 축조하고 청야 전술을 사용하여 일본군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유성룡은 평지 읍성에서의 방어보다는 일본의 공격에 대응하기 용이한 산성을 이용한 청야전술로 방어할 것을 주장하였다. 유성룡은 산성은 일본의 조총의 위력을 무력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전쟁 중 행주산성 전투 등을 통해 그 효과가 확인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유성룡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전쟁 기간 중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남부에 집중적으로 산성이 수축되었다(『선조실록』 27년 7월 17일). 정유재란 중 여러 산성이 함락되자 산성 중심의 방어 전략에 대한 비판도 일부 대두되었으나 기본적으로 방어 위주의 수세적 군사전략은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아울러 병자호란 시기에도 산성 중심의 전략을 채택하고 청야 전술을 병용하였으나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서애전집(西厓全集)』
  • 『만기요람(萬機要覽)』
  • 『대전회통(大典會通)』
  • 육군 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12(군사사상), 경인문화사, 2012.
  • 노영구, 「한국의 역대 군사사상 이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정립의 방향」, 『이순신연구논총』20, 순천향대학교 이수신연구소, 2014.
  • 이장희, 「임란 중 산성수축과 견벽청야에 대하여」, 『부촌 신연철교수 정년퇴임기념 사학논총』, 일월서각,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