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사(天柱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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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남한산성 내에 건립된 7개의 승영사찰 중 하나.

개설

천주사(天柱寺)는 1624년(인조 2) 남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할 때 산성의 방어를 위해 성내에 건립한 승영사찰(僧營寺刹)이었다. 천주사는 남한산성의 서문(西門, 우익문) 가까이에 위치하여 서문의 방어를 책임졌다. 1907년 군대해산령으로 일제에 의해 남한산성 내 대부분의 승영사찰이 파괴될 때 함께 파괴되었다. 이후 천주사는 복구되지 않고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826번지에 절터만이 남아 있다.

내용 및 특징

천주사는 1624년(인조 2) 한양의 남쪽을 방어하기 위해 남한산(南漢山, 주장산, 일장산)에 축성한 남한산성의 성내에 있는 승영사찰이었다. 1624년 조선 조정은 이괄(李适)의 난을 겪은 후 축성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벽암각성(碧巖覺性)을 8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삼고 전국의 승군(僧軍)을 동원해 남한산성을 축성하였다. 산성은 1626년 4월, 2년 5개월 만에 완공되었는데, 축성 당시 이전부터 있던 망월사(望月寺)와 옥정사(玉井寺) 외에 국청사, 장경사, 개운사, 한흥사, 천주사, 동림사, 남단사 등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고, 그 사찰 중 하나가 천주사였다. ‘천주(天柱)’라는 절 이름은 부처의 가호 아래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천주사를 비롯한 남한산성 내의 7개 사찰은 축성에 동원된 승려들이 거처하며 숙식을 해결하는 군막(軍幕) 사찰의 성격을 띠었다. 축성 후 승군은 성내의 사찰에 주둔하면서 산성을 방어하는 책무를 띠고 군사 훈련을 받았다.

천주사는 남한산성 내의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전국의 사찰에서 소집된 의승군(義僧軍)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다. 『남한지(南漢誌)』에 따르면 8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겸임한 승군총섭(僧軍總攝)의 지휘 아래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 350여 명의 의승(義僧)이 의승입번제(義僧立番制)에 따라 매년 2개월씩 윤번(輪番)으로 사찰에 복무하였다. 전국의 사찰에 할당된 수의 승려가 교대로 산성을 방위하는 이 제도는 지방 사찰의 재정을 고갈시키는 등 각종 폐단을 가져와 1756년(영조 32)에 폐지되었다. 의승방번제(義僧防番制)에 의해 승려들은 당번이나 번을 서지 않는 대신 10~22냥의 방번전(防番錢)을 납부하고 산성 사찰에서 복무하는 것을 면제받았다. 대신 본래부터 거주하는 승려[元住僧]로 하여금 그 역에 응하도록 하였다. 1785년(정조 9) 의승의 방번전이 절감되는 조치가 내려지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승군에 의한 사찰 운영은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으로 승군제가 폐지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변천

1) 근현대기의 천주사

1907년 8월 군대해산령 때 일제는 남한산성 안에 있던 무기 및 화약을 수거하면서 성내의 사찰도 대부분 파괴하였다. 당시 천주사도 이 참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파괴되어 절터만이 남아 있다. 현재 천주사지(天柱寺址)는 남한산성 남문(南門, 지화문)에서 산책로를 따라가다가 수어장대(守禦將臺)에서 250여m 못미처 자리하고 있다. 현재의 주소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826번지로, 사지에는 표석(表石)이 세워져 있다. 『남한지(南漢志)』에는 천주사의 누대 앞에 못이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참고문헌

  • 『가람고(伽藍攷)』
  • 『남한지(南漢誌)』
  •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편, 『한국호국불교의 재조명』1·2,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2012.
  • 전보삼, 『남한산성과 팔도사찰』, 대한불교진흥원, 2010.
  • 박용숙, 「조선후기 승역에 관한 고찰」, 『논문집』31, 부산대학교, 1981.
  • 여은경, 「조선후기 산성의 승군총섭」, 『대구사학』32, 대구사학회,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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