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진(天水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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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영변군에 설치하여 권관이 관할하던 보(堡).

개설

영변군(寧邊郡)은 조선초기부터 평안도 내지 방어의 핵심적인 곳이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영변을 기점으로 난을 일으키면서 1627년(인조 5) 인근 고을인 안주로 옮기기 전까지 평안도 절도사영이 설치된 곳이기도 하였다. 18세기 영변은 평안도 별후영이 되어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천수진은 영변의 동북부 도로변에 설치되어 교통로를 단속하고 외적을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천수진은 병마동첨절제사를 두었던 곳이기도 하다.

위치 및 용도

천수진은 영변군에서 희천군(熙川郡)으로 올라가는 경로이자, 운산군(雲山郡)에서 덕천군(德川郡)으로 가는 길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천수진 주변은 강줄기를 따라 완만하게 이어지는 지형이었기 때문에 북쪽으로 올라가는 가장 좋은 교통로였다. 역으로 대규모 적이 침입했을 경우 가장 활용하기 좋은 침투 경로이기도 했다.

천수진의 역할은 교통로 방어와 감시였다. 평안도의 방어체제는 기본적으로 순(巡)·병영(兵營)―주진관(主鎭管)·독진(獨鎭)―진보(鎭堡)―파수(把守)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여기에 지휘체계가 미치기 어렵거나 주요한 군사적 요충지에는 추가적으로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천수진과 같은 진보는 평안도 최전방과 내지의 요충지에서 실질적인 방어를 담당하는 군사시설이었다. 진보는 적 침입 시 일차적인 방어처로서 각지에 있는 봉수와 파수를 관리하였다.

변천 및 현황

천수진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실록에는 1722년(경종 2)에 처음 등장한다. 평안감사권업(權𢢜)은 도내 두 수군 방어영을 혁파할 것을 청하면서 동시에 육군 방어체제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개편을 제안하였다. 이때 그는 천수진은 영변(寧邊)에 소속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발언하였다(『경종실록』 2년 3월 13일). 1746년(영조 22) 비변사에서는 병조 판서 김약로(金若魯)가 평안감사로 있을 때 제안한 여러 방어책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면서 천수진을 극성령(棘城嶺) 밑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영조실록』 22년 3월 22일). 이 제안이 실현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군사적 위상이 이전보다 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속대전』에 규정한 평안도 진보체제에서는 천수진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1749년(영조 25) 철산의 서림성(西林城)에 새로 첨사진을 설치하면서 성안에 기계(機械)를 비치하는데 천수진의 군졸 200여 명에게 매년 포(布)를 거두어 보태게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좌의정조현명(趙顯命)은 이것이 뒷날 폐단이 될 것이니 절목에서 없애버릴 것을 제안하였는데, 이 기사 이후로는 천수진이란 이름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영조실록』 25년 7월 20일).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여지도서(輿地圖書)』
  • 강석화,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압록강변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4,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
  • 고승희,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도로 방어체제의 정비」, 『한국문화』34,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
  • 이철성, 「17세기 평안도 ‘강변 7읍’의 방어체제」, 『한국사학보』13, 고려사학회, 2002.
  • 임성수, 「18세기 평안도 진보재정의 운영과 변화」, 『한국사학보』46, 고려사학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