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금(戚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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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명군 제독이여송을 따라 종군한 명나라 장수.

개설

1593년(선조 26) 조선에 입국하여 평양성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때 남병(南兵)이라고도 불린 절강성(浙江省) 군사들의 전법은 조선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의 전법체계인 절강병법(浙江兵法) 혹은 척가병법(戚家兵法)은 척계광이 창안한 ‘어왜법(禦倭法)’이었고, 척계광의 인척으로 알려진 척금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척금은 용감한 장수로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겸손함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척금은 부대의 규율을 엄격히 하여 주변에 폐를 끼치지 않았다. 약포(藥圃)정탁(鄭琢)은 그를 두고 ‘옛 장수의 풍모를 지닌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전라도 여산군에는 척금의 군대가 주둔하면서 전혀 해를 끼치지 않았던 점을 칭송하는 청덕비(淸德碑)가 백성들에 의해 세워지기도 했다. 그는 1594년 1월에 귀국하였다.

가계

활동 사항

척금은 1581~1583년에 걸쳐 계주수비(薊州守備), 대수욕유격(大水峪遊擊), 고북구참장(古北口參將) 등을 역임한 인물로 주로 북변의 몽고와의 접경 지역에서 활동했다. 당시 계주와 요동에서 명망을 떨치던 총병(總兵)척계광(戚繼光)의 인척이었다고 한다.

척금은 1593년(선조 26) 1월, 흠차통령가호계송조병유격장군(欽差統領嘉湖薊松調兵游擊將軍)이라는 직함으로 1천 명의 보병을 거느리고 조선에 입국했다(『선조실록』 26년 1월 11일). 척금은 조·명연합군으로 평양성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제독이여송은 승세를 타고 개성을 공격하였다가 벽제관 전투에서 참패하였고, 공격에는 차질이 생겼다. 척금은 평양으로 돌아와 수비를 맡았다가 개성 일대의 일본군이 철수하게 되면서 이여송의 지시를 받아 개성에 주둔하였다(『선조실록』 26년 3월 13일).

이 시점에 명군은 이미 일본군과의 전쟁보다는 강화하는 쪽으로 입장이 기울고 있었다. 당시 조선은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요청했으나, 대부분의 명 장수들은 이러한 조선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오히려 강화의 필연성을 설득시켰다. 척금도 이러한 입장에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 총병이영(李寧)과 유격전세정(錢世禎) 등과 함께 도체찰사(都體察使)유성룡 등을 어르고 달래면서 강화를 강조했다(『선조실록』 26년 4월 24일). 이로 인해 척금은 선조로부터 강화를 추진하려는 인물로서 불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척금이 일방적인 강화를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화교섭을 중시하면서도 이는 일본군의 완전 철수를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선조실록』 26년 11월 18일). 또 척금은 진주성(晉州城)이 일본군의 공격에 의해 함락되자 출병하여 임실까지 갔다가 전주를 거쳐 다시 한성으로 돌아왔다. 척금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지키기 위해서 2만 명의 명군을 잔류시킬 논의를 알리면서 그 군량의 소모를 고려하여 병력을 줄이는 현실적인 의견도 제시했다(『선조실록』 26년 8월 29일). 또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는 겸손함을 보였고 그의 군대는 민폐를 끼치지 않아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척금은 1594년 2월에 귀국하면서 조선 군병의 조련을 위해서 『기효신서(紀効新書)』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선조실록』 31년 2월 21일). 대체로 척금은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었으나, 적어도 전란 극복에 기여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척금은 귀국 후에 남군이 일으킨 난동에 대한 처벌을 받았다가 1602년(선조 35) 6월에 재기용되었다. 그는 천진유격(天津遊擊)을 거쳐 1619년(광해군 11) 5월에는 진정유격(眞定遊擊)이 되었고, 1621년(광해군 13) 요양(遼陽)에서 총병(摠兵)하세현(賀世賢)과 함께 후금(後金)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다 전사하였다.

참고문헌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김경태, 「임진전쟁기 강화교섭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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