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평현(昌平縣)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창평현 |
한글표제 | 창평현 |
한자표제 | 昌平縣 |
상위어 | 전라도(全羅道) |
동의어 | 굴지(屈支), 기양(祈陽), 명양(鳴陽), 명평(鳴平) |
관련어 | 강구연(姜九淵)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정성일 |
폐지 시기 | 1895년(고종 32)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창평현(昌平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세종실록』 17년 7월 22일, 『성종실록』 4년 12월 8일, 『성종실록』 5년 6월 15일, 『성종실록』 9년 4월 24일, 『성종실록』 9년 5월 21일, 『세조실록』 1년 9월 11일, 『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과 곡성군 옥과면 일부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고려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장평갑향권농사(長平甲鄕勸農使)를 두고 창평현(昌平縣)을 겸임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후 1409년(태종 9)에 창평현이 관할해 오던 1현 1부곡을 창평현에 편입하였다. 1455년(세조 1)에 창평현이 전라도 나주도(羅州道)의 좌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는 창평현이 전라도 7진 가운데 하나인 광주진에 속했다. 1474년(성종 5)에 강구연(姜九淵)이 창평현령을 능욕한 일로 창평현을 폐지하고 광주에 편입하였다가 1478년(성종 9)에 창평현이 다시 세워졌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창평현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 940년(고려 태조 23)에 무주(武州)가 거느리던 기양현(祈陽縣)을 창평현으로 개칭하고 나주의 속현으로 삼았다. 1391년에 장평갑향권농사를 두고 현령(縣令)을 겸임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창평현이 그 뒤에 나주로, 다시 광주로 관할이 바뀌었다가, 1391년에 와서 원래대로 창평현으로 되돌렸다고 되어 있다. 조선이 건국한 후에도 이것이 이어졌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현(縣)과 향(鄕)·소(所)·부곡(部曲)은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이때 창평현이 관할해 오던 1현과 1부곡이 창평현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1현은 갑향(甲鄕)이고, 1부곡은 장평(長平)이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창평현에 종5품 현령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현령은 종6품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다. 훈도는 5백 호 이상인 고을에는 모두 두기로 한 것에 따른 것이다(『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창평현령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현령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현령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변천
1409년에 창평현이 관할해 오던 향과 부곡이 폐지되어 창평현에 편입된 뒤로는 창평의 영역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서로 인접한 창평현과 담양부 사이의 경계를 조정하는 방안이 논의된 적이 있었다. 1435년(세종 17)에 전라도감사민심언(閔審言)이 개선안을 제시하였다. 창평현이 땅도 좁고 백성도 적을 뿐만 아니라 창평 관내의 장평과 갑향이 구획을 뛰어넘어 담양부의 경내에 들어갔으니, 창평을 담양에 합쳐야 한다는 것이었다(『세종실록』 17년 7월 22일).
1474년에는 창평의 품관(品官) 강구연이 창평현령전순도(全順道)를 능욕한 일로 창평현을 폐지하고 광주(光州)에 편입시켰다(『성종실록』 4년 12월 8일) (『성종실록』 5년 6월 15일). 1478년에는 창평현의 복구를 요청하는 김유산(金宥山)의 상소가 있었다. 이조(吏曹)에서는 복설을 반대하였으나, 성종이 창평현을 다시 세우라고 명하였다(『성종실록』 9년 4월 24일) (『성종실록』 9년 5월 21일). 그런데 『증보문헌비고』에는 창평현의 복설 시기가 1479년(성종 10)으로 되어 있어서 1년 차이를 보인다.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나누어서 소속을 정하였다. 이때 창평현을 전라도 나주도(羅州道)의 좌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각 도의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을 두었는데 창평현은 전라도의 광주진에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진관 체제는 그 뒤로도 조금씩 변화를 거치면서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창평이 속한 광주진은 나주진관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5개 거진을 중심으로 그 아래 여러 진에 편제된 내륙과 연해 지역의 육군과 수군이 전라도의 방위를 맡았다.
조선후기에는 남원거진이 전라좌영(全羅左營)으로 바뀌었다. 좌영(左營)의 속읍은 남원·곡성·장수·창평·옥과·구례·운봉 7곳이며, 좌영의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2초(哨), 속오(束伍) 34초, 표하군(標下軍) 287명, 당보군(塘報軍) 120명, 수솔군(隨率軍) 492명으로 되어 있다.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창평현이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남도는 창평군을 비롯한 32개 군과 제주목인 1목으로 편성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김정호, 『지방 연혁 연구-전남을 중심으로』, 광주일보출판국, 1988.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담양군지』, 담양군지 보정판 발간위원회, 2002.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