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빈안씨(昌嬪安氏)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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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창빈안씨 |
한글표제 | 창빈안씨 |
한자표제 | 昌嬪安氏 |
분야 | 왕족/후궁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연산군~명종 |
집필자 | 홍연주 |
봉작 | 창빈(昌嬪) |
출신 | 왕족 |
성별 | 여자 |
출생 | 1499년(연산군 5) 7월 27일 |
사망 | 1549년(명종 4) 10월 18일 |
본관 | 안산(安山)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 내 |
부 | 안탄대(安坦大) |
모_외조 | 황씨(黃氏) |
처_장인 | (남편)중종(中宗) →(자녀)3남 1녀 |
자녀 | (1자)영양군(永陽君) 이거(李岠) (2자)이이수(李頤壽) (3자)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岧) (1녀)정신옹주(靜愼翁主)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창빈안씨(昌嬪安氏)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10년 5월 21일, 『효종실록』 9년 11월 14일, 『숙종실록』 2년 5월 21일, 『숙종실록』 7년 3월 17일, 『숙종실록』 7년 8월 3일, 『숙종실록』 19년 10월 13일, 『경종실록』 2년 1월 15일, 『영조실록』 10년 2월 18일, 『정조실록』 4년 2월 12일, 『정조실록』 23년 8월 19일, 『순조실록』 4년 9월 1일 |
총론
[1499년(연산군 5)~1549년(명종 4) = 51세]. 조선의 11대 왕인 중종(中宗)의 후궁. 본관은 안산(安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안탄대(安坦大)로 적순부위(迪順副尉)를 지내고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된 황씨(黃氏)이다.
중종의 후궁
1507년(중종 2) 내명부의 궁인으로 들어온 안창빈(安昌嬪)은 대왕대비이던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눈에 들어 대비를 모시던 중, 20세가 되던 1518년(중종 13) 중종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었다. 1520년(중종 15) 정5품 상궁에 배수되었으며[『약천집(藥泉集)』권14 「창빈묘지명(昌嬪墓誌銘)」] 이듬해인 1521년(중종 16) 첫째아들 영양군(永陽君)이거(李岠)를 낳았고, 1526년(중종 21) 10월 5일에는 정신옹주(貞愼翁主)를 낳았다.
1529년(중종 24) 숙원(淑媛)의 첩지를 받아 중종의 공식적인 후궁이 되었으며, 1530년(중종 25) 3월 5일 후에 선조(宣祖)의 아버지가 되는 덕흥군(德興君)이초(李岧)를 낳았다. 1540년(중종 35) 숙용(淑容)으로 품계가 올랐다. 중종이 1544년(중종 39) 세상을 떠나자 상이 끝난 후 안창빈은 인수사(仁壽寺)에 나가 거처하고자 하였으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명으로 궁중에 남아 계속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1549년(명종 4) 10월 18일 사가에 나갔다가 특별한 병증도 없이 51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약천집』권14 「창빈묘지명」]
창빈으로 추존
1567년(선조 즉위년) 안창빈의 셋째 아들이었던 덕흥군의 셋째아들 하성군(河城君)이 조선의 14대 왕 선조로 즉위하였다. 이에 선조는 1577년(선조 10) 숙용의 지위로 세상을 떠난 자신의 친할머니를 창빈으로 추존하고 덕흥대원군의 사당에 제향할 것을 명하였다.(『선조실록』 10년 5월 21일),[『약천집』권14 「창빈묘지명」] 이후 1658년(효종 9) 송시열(宋時烈)은 안창빈의 신주를 조천(祧遷)할 것을, 송준길(宋浚吉)은 불천위(不遷位)로 모실 것을 주장하였고, 다른 조정 대신들도 각각 송시열과 송준길의 의견을 지지하며 갈렸다가 결국에는 불천위로 결정되었다.(『효종실록』 9년 11월 14일),[『승정원일기』효종 9년 11월 8일],[『승정원일기』효종 9년 11월 11일],[『승정원일기』효종 9년 11월 13일],[『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2 「선조조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1676년(숙종 2)에는 종신 한평부수(漢平副守) 이연(李演)이 안창빈의 묘에 수호군(守護軍)을 두고 제수를 마련할 것을 청하자 허적(許積)·정지화(鄭知和) 등이 반대의 뜻을 밝혔으나 숙종(肅宗)이 이를 윤허하였다.(『숙종실록』 2년 5월 21일) 또한 낭원군(朗原君)이간(李偘)의 상소로 1681년(숙종 7) 안창빈의 묘비석(신도비)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도 왕의 재가를 받아,(『숙종실록』 7년 3월 17일) 3년 후인 1684년(숙종 10) 완성되었다.[『승정원일기』숙종 10년 3월 15일],[『승정원일기』숙종 10년 3월 17일],[『승정원일기』숙종 10년 5월 20일] 한편 1681년(숙종 7) 교정청(校正廳)에서 『어첩(御牒)』과『선원록(璿源錄)』 51권의 교정을 마무리하면서 『지장통기(誌狀通記)』7권과 『왕비세보(王妃世譜)』 3권을 만들 때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인빈(仁嬪)과 더불어 안창빈의 지장(誌狀), 지문(誌文) 및 행장(行狀)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추가로 실었다.(『숙종실록』 7년 8월 3일) 이 외에도 숙종은 해마다 안창빈의 기제(忌祭) 때 쌀 5석을 선혜청(宣惠廳)에서 수송할 것을 법으로 정하게 하였다.(『숙종실록』 19년 10월 13일)
이후 경종(景宗) 때의 사친(私親)을 추보하는 것에 대한 논의,(『경종실록』 2년 1월 15일) 영조(英祖) 때의 사친의 부모에 대한 추증 논의,(『영조실록』 10년 2월 18일) 정조(正祖)·순조(純祖)·고종(高宗) 때 안창빈 묘소에 치제(致祭)를 명한 것(『정조실록』 4년 2월 12일),(『정조실록』 23년 8월 19일),(『순조실록』 4년 9월 1일),[『고종실록』 5월 3월 14일 2번째기사] 등은 모두 조선 후기 안창빈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묘소와 후손
안창빈의 무덤은 본래 경기도 양주읍(楊州邑) 서쪽 장흥리(長興里)에 두었으나, 이후 묘소가 좋지 않다 하여 1550년(명종 5) 지금의 위치인 경기도 과천현(果川縣) 동작리(洞雀里) 곤좌(坤坐)의 산으로 옮기고, 그곳의 지명에 따라 동작릉(銅雀陵)이라 불렀다.[『약천집』권14 「창빈묘지명」] 숙종 때 세워진 신도비 비문(碑文)은 예조 판서(判書)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낸 신정(申晸)이 지었으며, 글씨는 돈녕부(敦寧府) 지사(知事)를 지낸 이정영(李正英)이 썼다. 현재 서울국립현충원 내 위치해 있으며, 1983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었다.
안창빈은 중종과의 사이에서 3남 1녀를 두었는데 3남이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이다. 1남은 영양군이거로 현감안세형(安世亨)의 딸과 혼인하였고, 2남 이이수(李頤壽)는 일찍 세상을 떠나 봉작을 받지 못하였다. 3남 덕흥대원군이초는 정인지(鄭麟趾)의 손자인 중추부(中樞府) 지사(知事)정세호(鄭世虎)의 딸과 혼인하여 3남을 두었는데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이 훗날 선조로 즉위한다. 1녀인 정신옹주(靜愼翁主)는 청천위(淸川尉)한경우(韓景祐)와 혼인하였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고종실록(高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약천집(藥泉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미선, 「조선시대 후궁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 지두환, 『중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