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장(賑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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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이나 곡식을 제공하던 곳.

개설

흉년 등으로 인하여 굶주린 백성이 발생할 경우 정부에서는 진휼정책을 통하여 백성을 구제하였다. 형편이 나은 경우에는 환곡을 통하여 곡식을 꾸어 주고 가을에 갚도록 하였지만, 갚을 능력이 없고 굶어 죽을 위험에 처한 경우에는 무상으로 곡식이나 죽을 나누어 주었다. 이때 곡식이나 죽을 나누어 주던 곳이 진장 또는 진제장(賑濟場)이었다(『태종실록』 14년 6월 11일). 진장은 굶주린 백성이 많이 발생할 경우 임시로 설치되었으며, 일반적으로 1월부터 4월까지 설치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진장 또는 진제장은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이나 곡식을 제공하여 그들이 굶어 죽는 일을 방지하기 위하여 마련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일정 기간 구제하여 고향을 떠나지 않게 하거나, 고향을 떠나 떠도는 사람들을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업에 종사하게 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진제장의 운영은 최소한의 농민 재생산 구조를 보장하여 체제 유지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이었다.

내용

흉년으로 고향을 떠나 떠도는 사람들이 구걸 이외에 음식과 양식을 얻을 수 있었던 방법은 진제장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진제장은 큰 흉년으로 인하여 다수의 굶주린 사람과 떠도는 사람이 발생할 경우 왕명(王命)이나 호조(戶曹)·한성부의 요청에 의하여 설치되었다(『세종실록』 19년 2월 4일).

조선초기 한성부에서는 대규모의 흉년이 아닐 경우에는 상설 의료 기관인 동·서 활인서에서 병자와 굶주린 사람들의 구제를 담당하게 하였다. 기민(飢民)의 수가 많아지면 보제원(普濟院)·홍제원(弘濟院)·이태원(利泰院) 등에 진제장을 설치하였다(『세종실록』 18년 8월 5일). 17세기 현종대에 들어서는 상평청과 진휼청에서 진제장을 설치하여 죽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지방에서는 감사와 지방관이 진제장을 설치하여 구호사업을 실시하였다. 조선왕조의 재해 대책 중심은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 떠도는 사람들을 긴급히 구호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본적지에 다시 돌려보내려는 정책을 원칙으로 하였다. 진제장에서 죽을 얻어먹기 위해서는 원래 살았던 거주지를 밝혀야만 하였고, 죽을 지급하는 기간에는 이주하거나 구걸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호적에 등록되지 않은 기민이나 고향에서 세금을 제대로 내지 못하고 떠나온 사람들은 진제장에 갈 수 없었다. 또한 좁은 진제장에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몰리면서 노숙하는 경우에는 전염병의 위험도 있었는데 이것도 진제장을 기피하는 이유가 되었다.

무상지급의 기간은 대체로 1월부터 시작하여 4월, 늦어도 5·6월에는 끝내곤 하였다. 기근이 극심할 경우에는 해가 바뀌기 전에도 시행하고 7·8월까지 연장되는 경우도 있었다. 죽 혹은 곡식의 지급량은 18세기 중반까지는 일정하지 않다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진휼청에서 일정하게 규정하였다. 1일당 죽 혹은 곡식의 지급 액수는 16~50세의 남자에게는 5홉, 51세 이상의 남녀와 16~50세의 여자에게는 4홉, 11~15세의 남녀에게는 3홉이 확정되었다.

변천

17세기 후반 이후 비축곡이 증가하자 흉년에 곡식을 무상으로 지급하는 일이 주된 구황정책이 되었다. 10일 1회씩 곡물을 지급할 때에는 죽을 끓여 기민에게 제공하였다.

참고문헌

  • 『목민심서(牧民心書)』
  •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
  • 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 간행위원회 편, 『한국사학논총: 이기백 선생 고희 기념』 (상, 하), 일조각, 1994.
  • 이상협, 「조선 전기 한성부의 진제장(賑濟場)에 대한 고찰」, 『향토서울』 54, 1994.
  • 이상협, 「조선시대 동·서활인서에 대한 고찰」, 『향토서울』 56, 1996.
  • 조규환, 「16세기 진제(賑濟) 정책의 변화」, 『한성사학』 10,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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