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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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광무 10) 4월 22일에 고종의 비인 엄귀비의 남동생 엄준원이 근대적인 여성 교육을 위해 세운 여자 학교.

개설

1897년(광무 1)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후 근대적 교육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면서 여성 교육을 위한 학교 설립이 추진되었다. 이때 평양 출신의 양현당(養賢堂) 김씨가 여성 민간인의 손으로 서울에 정선여학교(貞善女學校)를 설립하였고, 1898년에는 기독교계 여성들이 순성여학교(順成女學校)를 세웠다. 특히 1905년(광무 9) 을사조약 이후에는 국민들의 애국열이 교육열로 연결되어 여학교 설립이 활발해졌다. 이런 근대적 여성 고등 교육 기관의 설립 와중에 세워진 것이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이다. 진명여학교는 1906년 4월 엄준원(嚴俊源)이 사재를 동원하고 누나인 엄귀비(嚴貴妃)가 토지를 희사해 설립되었다. 학교명을 진명(進明)이라고 한 것은 ‘쌓고 학업을 닦아서, 나의 빛으로 겨레와 온 누리를 밝게 비추어 전진한다’는 뜻의 진덕계명(進德啓明)에서 비롯되었다. 초대 교장에는 엄준원이 취임했으며, 학감에는 이화학당 출신의 메리 황([黃袂禮], Mary Whang)이 임명되었고, 서양인 교사들로 구성하였다. 메리 황은 진명여학교가 남녀에게 평등하게 지식을 주입하여 양자가 함께 국가를 조직하려는 목적으로 교육한다고 하였다. 자매교(姉妹校)였던 숙명여학교(淑明女學校)가 일본식 학습원(學習院) 교육을 지향한 것과 반대로 진명여학교는 서양식 교육을 도입하였다.

내용 및 특징

학교 설립 초기에는 수업료와 학용품도 무료로 제공하여 여학생들에게 글을 배우게 하였다. 1908년(융희 2)에는 보통과 제1회 졸업과 동시에 진명여학교 유치부·예비과·중등과를 설치하였으며, 벽돌집의 교사를 신축하였다. 진명여학교의 설립은 사립여학교들이 줄지어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1906년 7월에는 주학신(秦學新)·김운곡(金雲谷)·김송암(金松岩)·김호산(金湖山) 등이 여자 교육에 찬성할 의무와 부인 사회의 문명을 개진할 목적으로 여자교육회를 조직하였다. 여자교육회는 설립 취지서를 발표하고, 여성의 문명을 개진할 목적으로 양규의숙(養閨義塾)을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뒤에 경성여자학교로 바뀌었고, 다시 덕수소학교(德壽小學校)로 개편되었다. 당시 『만세보(萬歲報)』에서도 여성 교육이 급선무임을 밝혔는데, “우리 대한 여자가 남자 압제력을 받고 심규(深閨)에 금고(禁錮)하여 인도상 결점을 담아 가진 감정을 융해하고 일반 사회에 동등권제(同等權制)를 극복하고자 하려면 첫째 교육에 있다.”라고 강조하였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1907년(융희 1) 명진여학교(明進女學校)와 여자보학원(女子普學院)이 세워졌고, 1908년에는 동원여자의숙(東媛女子義塾)·보명여학교(普明女學校)·양정여학교(養正女學校)·양원여학교(養源女學校), 1910년(융희 4)에는 양덕여학교(養德女學校) 등이 세워졌다. 이 중 동원여자의숙은 1909년 4월에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과 병합했다. 이들 사립여학교는 미션 여학교나 관공립 여학교와 마찬가지로 각 가정을 호별 방문하여 학생을 모집하였다. 학생이 학교에 나오면 교과서와 문방구 등을 무상으로 공급해 주어 계속 나오도록 유도했다. 그 이유는 당시 여학생을 구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집한 학생도 그만두는 일이 잦았다. 학생들의 가정에서 신교육을 이해하지 못했고, 당시까지도 유교적 내외법이 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학교의 학제에는 연중 수업 시간과 방학이 없었으며 농번기가 방학이었다. 선생님들의 교수법도 서당식이었고 학년과 학기의 구분이 없었을 뿐 아니라 졸업이라는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8년 4월 2일에 칙령(勅令) 제22호인 고등여학교령(高等女學校令)이 반포되어 여성의 고등 교육이 법적으로 보장되었다(『순종실록』 1년 4월 2일). 이는 황실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진명여학교를 엄귀비가 세웠듯이 여학생 교육은 황실 여성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권장되었다. 순종의 비인 순명효황후는 1908년 5월에 휘지(徽旨)를 내려 여성들의 고등여학교 취학을 권장하였다. 휘지에서는 광무(光武) 유신(維新) 이후로 새로운 학문을 일으켰는데 보통 교육은 남자나 여자의 구별이 없으니 나라에서도 여자들에 대한 교육을 중요하게 여긴다면서 황후가 스스로 스승을 맞아들이고 교육을 받는 것을 본받으라고 하였다. 또한 정부에서 한성(漢城)에 고등여학교를 창설하는 것은 황후의 뜻이 실현되는 것이므로 부형들은 딸들을 학교에 입학시켜 교육을 받게 하라고 했다(『순종실록』 1년 5월 20일). 순종도 황후와 같이 관립 고등여학교 학생들이 북일영(北一營)에서 운동회를 할 때 관람하였으며, 황족과 대신들이 부인들과 함께 참가했다(『순종실록』 2년 5월 12일). 황실의 관심에 응답하듯이 진명여학교의 생도들은 고종의 탄신일을 봉축하며 선물을 올렸고(『순종실록 부록』 6년 9월 8일), 황실에서는 학용품을 주기도 했다(『순종실록 부록』 6년 10월 14일).

변천

1912년 4월 9일에 사립 진명여학교의 조직이 변경되어 재단법인이 되었다. 당시 경성 북부 창성동(昌成洞)에 있던 학교의 자산은 100,000엔이었으며 이사는 엄준원(嚴俊源), 소삼언치(小杉彦治), 소산계랑(小山季郎)이었다. 엄준원은 평생 학생 교육에 많은 관심을 쏟았으나 일제에 협력하여 중추원 참의까지 지냈다.

1912년 기예과를 설치하여 농업, 수자수, 직물 등의 기술 교육을 시도하였다. 1914년 8월에는 화재로 기숙사 35칸이 전소하였다. 1916년에는 강당을 신축하였고, 1928년에는 음악강당을 설치하였다. 1938년 진명고등여학교, 1947년 진명여자중학교로 개칭하였다. 해방 후 1951년 「교육법」개정에 따라 진명여자고등학교와 진명여자중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87년 진명여자중학교는 폐교되고 진명여자고등학교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 『만세보(萬歲報)』
  •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
  • 『매일신보(每日申報)』
  • 숙명여자대학교 아세아여성문제연구소, 『한국근대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1987.
  • 丁堯燮, 『한국여성운동사』, 일조각, 1971.
  • 朱耀翰·鄭英助, 『保護條約時期의 학회 및 단체운동』, 대성문화사, 1965.
  •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 중앙편』, 민족문제연구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