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학교수(地理學敎授)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지리학교수 |
한글표제 | 지리학교수 |
한자표제 | 地理學敎授 |
대역어 | 풍수학교수(風水學敎授) |
상위어 | 관상감(觀象監), 서운관(書雲官), 음양학(陰陽學) |
관련어 | 종육품(從六品), 풍수학(風水學) |
분야 | 정치/행정/관직·관품 |
유형 | 직역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김혜정 |
관품 | 종육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지리학교수(地理學敎授)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중종실록』 8년 3월 9일, 『영조실록』 17년 1월 25일, 『정조실록』 15년 10월 27일, 『광해군일기』 3년 3월 18일, 『광해군일기』 3년 3월 19일, 『선조실록』 33년 7월 22일, 『현종실록』 15년 5월 7일, 『영조실록』 4년 3월 14일 |
조선시대에 관상감에서 풍수지리 업무와 교육을 맡아보던 종6품 지리학 관리.
개설
지리학교수(地理學敎授)는 조선시대 음양학 담당 기관인 관상감에서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의 세 분야 가운데 지리학 직무를 맡아보고 지리학 관리들을 교육하던 직책이다. 지리학교수는 1명이었고, 정무를 볼 때 쓰는 도장인 인신(印信)을 가지고 있었다. 정조 이전에는 지리학 관원들 가운데 판관 이상의 녹관직을 지낸 관원들 중에서 임명했다. 후보가 추천되면 천문학과 지리학의 임관들이 모여서 후보자의 이름 아래에 점을 찍는 권점(圈點)으로 결정했다. 1791년(정조 15)에 지리학 실관(實官) 7명 중에서 추천, 임명하는 것을 규정으로 정했다.
담당 직무
지리학교수는 관상감에서 풍수지리 술법을 바탕으로 왕실의 능묘 입지와 그 주변 산수 형세의 길흉을 판단하는 지리학 직무를 수행하였다. 태실을 정하고 보수하거나 천장할 장소나 하관할 곳을 정하거나 길일을 가리는 등 풍수지리 관련 업무를 도맡아보았다. 지리학 관원들을 교육하거나 체아직을 수행하는 것도 지리학교수의 몫이었다.
변천
지리학교수가 소속된 관상감은 고려시대 태복감(太卜監)에서 유래하였다. 태복감은 사천대(司天臺), 사천감(司天監), 관후서(觀候署)로 바뀌었다가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에는 서운관(書雲觀)이었고 다시 관상감으로 개칭되었다. 지리학교수 제도는 세조 때 “풍수학은 지리학으로 이름을 고쳐서 교수와 훈도 한 명씩을 둔다.”는 안건 하에 겸교수관(兼敎授官)이 교수로 바뀌면서 마련되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지리학교수는 줄여서 지리학으로도 불렸다(『중종실록』 8년 3월 9일). 지리학교수는 음양과를 거치고 일정 기간 직무 경험을 쌓은 관원들 사이에서 추천된 뒤 천문학과 지리학 임관들의 결정으로 임명되었다. 지리학교수는 정무를 볼 때 쓰는 도장인 인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잡과(雜科)를 거쳐 선발되었지만, 일반 문무관들에게 주어지던 동반(東班)이나 서반(西班)의 정직(正職)에 임명될 기회도 있었다.
지리학교수는 지리학 관원으로 60개월 일한 후에야 종6품의 지리학교수에 오를 수 있었다(『영조실록』 17년 1월 25일). 『서운관지』에 따르면 1750년(영조 26)에 실직에서 물러나 품계와 직명만 있는 한산교수(閒散敎授) 자리를 폐지하고 대신 지리학교수 자리를 두었다. 1791년에 지리학교수는 과거 시험에 합격한 지리학 실관 7명 중에서 추천, 임명하는 것을 규정으로 하였다.
조선시대에 녹봉 없이 근무하는 체아직에서, 지리학교수와 훈도를 지낸 관원들 가운데 정9품 서반 체아직(遞兒職)인 사용(司勇) 자리, 즉 간산사용(看山司勇)을 돌아가며 맡다가, 1791년부터는 화회사용(和會司勇) 자리만 맡게 되었다. 지리학교수는 정부에서 잡과 출신에게 주는 급여인 요식을 받았다(『정조실록』 15년 10월 27일).
지리학교수로는 광해군 때 이의신이 거론되는데(『광해군일기』 3년 3월 18일), (『광해군일기』 3년 3월 19일), 그는 『옥수진경(玉髓眞經)』을 인용하여 선조에게 첫째 부인인 의인왕후 능묘의 오른쪽 긴 혈에 묻힐 것을 권유했다(『선조실록』 33년 7월 22일). 현종 때는 지리학교수박진문이 하관 길일을 논의하였고(『현종실록』 15년 5월 7일), 영조 때는 지리학교수안호가 언급되어 있다(『영조실록』 4년 3월 14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상촌집(象村集)』
- 김두규,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 2000.
- 성주덕 편저, 이면우 외 역주, 『서운관지』, 소명출판, 2005.
- 한국과학사학회 편, 『서운관지·국조역상고』,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1982.
- 김석렬, 「영·정조시대 관상감 관원연구:관직과 과시 합격자 분석을 중심으로」, 『우암논총』, 청주대학교 대학원, 1989.
- 유경로, 「서운관지의 번역, 주 및 해설 3:천거·과시·취재」, 『한국과학사학회지』, 한국과학사학회, 1991.
- 이몽일, 「한국 풍수지리 사상의 변천과정」,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 이수동, 「조선시대 음양과에 관한 연구」, 원광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 장성규, 「『조선왕조실록』의 풍수지리문헌 연구:『청오경』·『금낭경』·『호수경』을 중심으로」,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 조승구, 「조선초기 서운관의 기능과 변천」,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8.
관계망